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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 시시각각

위만 보면 아래가 안 보이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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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기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유형의 기사는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는’ 기사다. 재미있되 황색 저널리즘에 물들지 않아야 하고, 무게있는 시사점을 담되 논문처럼 딱딱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지난 일요일(25일)자 중앙SUNDAY에 그런 기사가 실렸다. 제목은 ‘MB(이명박 대통령), 밀어붙이기 화법이 공무원들 오버 부른다’. 요컨대 대통령의 ‘하면 된다’ 리더십이 정책 시행 과정에서 엉뚱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내용이다. 대통령의 말을 공무원들이 자기 입장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고, 종종 ‘오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사가 소개한 사례들은 그야말로 재미와 의미를 겸비하고 있다. 대통령이 “통행료 등 서민생활비를 대폭 줄여라”고 하자 국토해양부·서울시에 비상이 걸렸다. 서울시내 교통혼잡 같은 역작용을 두루 감안하자면 통행료 감면 범위 축소가 불가피했다. 고심 끝에 마침내 고속도로 통행료 50% 할인대상자가 정해졌다. 어떤 사람이 할인받을 수 있었을까. ‘서울시내 직장 출퇴근자 중 기흥IC 근방에 살고 운전자를 포함해 3명 이상을 태우고 오전 7시 이전에 궁내동 톨게이트를 통과하는 사람’이 정답이다. 뼈 빼고 따귀 빼고 맹물 섞어서라도 어쨌든 공무원들은 대통령의 말씀을 훌륭하게 실천했다. 역시 하면 된다.

지난달 4일 문을 연 경기도 화성시 서부경찰서는 더 가관이다. 3월 15일 대통령이 “사고 많이 나는 화성에 왜 경찰서 하나 없나”라고 지적했다. 당연히 경찰청에 비상이 걸렸다. 주민들이 십수 년 애원해도 생기지 않던 경찰서가 불과 20일만에 턱 하니 들어섰다. 물론 제대로 된 청사가 준비됐을 리 없다. 신남동에 있는 백금전자라는 중소기업 뒷마당을 보증금 7억원, 월세 1200만원에 빌려 컨테이너 13개를 들여놓고 임시 사무실로 삼았다. 게다가 10억원을 들여 임시 사무실 리모델링 공사를 하면서 한편으로 인근 야산에 경찰서 청사 신축부지를 마련해 터닦기 공사가 한창이란다. 그 돈이 다 누구 돈인가. 할인품목 전단을 살펴가며 장 보는 값 아껴 세금으로 낸, 우리 호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다.

어찌 중앙SUNDAY가 보도한 사례들뿐이겠는가. 대통령이 3월에 경기도 일산경찰서를 방문해 어린이 납치 미수사건을 질책하자 일선 경찰서마다 납치·실종 수사 전담팀을 만드느라 법석을 떨었다. 그 과정에서 강력부서 인원까지 빼내는 바람에 다른 강력범죄 수사가 지장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이전에 납치·실종 사건 담당부서가 없었다면 또 모르겠다. 하던 사람이 하던 일 더 열심히 하면 되지 굳이 전담팀을 만드는 건 ‘윗분’만을 향한 생색내기에 불과하다.

10여 년 전에 전해 들은 원로 일본 언론인의 말이 떠오른다. ‘위만 보면 아래가 안 보이고, 아래만 보면 앞이 안 보인다’는 격언이다. 국가 최고지도자인 대통령의 말을 공직자가 무게있게 받아들이고 실천하려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위만’ 봐선 안 된다. 위만 쳐다보니까 국민의 평소 고충이나 민원은 나 몰라라 하다가 대통령이 한마디 하면 불에 덴 듯 자지러지는 것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전임 노무현 정권은 ‘아래만 보다 앞을 못 본’ 경우였다. 계층·지역 간 균형발전을 도모한다며 아래를, 그것도 어설픈 운동논리를 깔고 보느라 나라의 ‘앞’을 챙기지 못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한답시고 노 정권이 만든 비정규직 보호법을 보라. 당시 대량해고 사태를 빚은 것은 물론, 대상기업 확대를 놓고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부담을 주고 있지 않는가.

위만 보다 아래를 못 보는 것이나, 아래만 보다 앞을 못 보는 것이나 결국에는 리더십의 실패와 국민의 고통으로 귀결된다. 비유가 좀 심한 듯하지만, MB 정권 공직자 분들께 한 가지 여쭙겠다. 언제까지 귀 쫑긋거리며 “물어라, 쉭” 소리만 기다릴 것인가.

노재현 문화스포츠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