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총수 소환 財界 목소리-정치권 모든책임 기업에 떠넘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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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대기업 총수들이 줄줄이 검찰에 불려가고 있는 요즘 재계는 극심한 고통과 좌절감에 휩싸여 있다.
『한발만 나라 밖으로 나가면 총과 칼만 없다뿐이지 온통 전장터입니다.자기 나라,자기 회사,자기 물건을 PR하기 위해 혈안이 돼있습니다.』 모그룹의 한 고위관계자는 8일 『조사를 받고나면 다시 이 전장에 나서야할텐데 상처투성이의 장군이 지휘하는전쟁에서 과연 이길 수 있겠느냐』며 『정말 이길밖에 없는 것이냐』고 큰 걱정을 했다.
외국 기업인들에게 뭐라고 설명하며,상담은 어떻게 하고,투자는어떻게 할 것이냐고 기업인들은 반문한다.또 회사 직원들은 총수가 불려가는걸 어떻게 생각하겠으며 일반 국민들에게 「재벌=죄벌」으로 비쳐진다면 과연 기업과 기업인이 설 자리 가 어디 있겠느냐고도 묻고 있다.
재계는 일단 잘못된 과거는 당연히 청산돼어야 하며 이번 사건을 계기로 앞으로 다시는 정경유착의 악순환에 휘말리지 않도록 철저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또 이권이나 특혜를 바라고 뇌물을 줬다면 당연히 조사도 받고처벌도 돼야 한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성금 제공등 어쩔 수 없었던 부분까지도 싸잡아 문제가되고 있으며,기업인만이 「속죄양」이 되고 있는 모습에 당황하고있다. D그룹 기조실의 한 임원은 『내로라하는 그룹 총수가 검찰에 소환당하는 모습 자체가 우리 경제사의 수치』라며 『노태우(盧泰愚)씨를 비롯한 정치권에 근본적 원인이 있는데도 모든 책임을 기업인에 떠넘기고 있다』고 말했다.
『정치자금 내고 싶어 낸 사람 있습니까.』 지난주 전국경제인연합회 주관으로 열렸던 긴급 재계 모임에서 한 그룹 총수의 발언이다. 그는 『재벌이 돈 아까운 줄 몰라서 낸 것 아니다.기업은 코스트를 단돈 1원이라도 줄여보기 위해 피를 말린다.달라고 하니 안 줄 수 없어 준 것 아니냐.이런 사정을 국민들이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라고 덧붙였다.
다른 총수는 『뇌물과 성금은 확실히 구분해야 한다.다른 무엇보다 이번 일로 대내적으로는 기업이미지,대외적으로는 한국의 신인도가 떨어질까봐 가장 걱정된다』고 말했다.
해당 회사에 몸담고 있는 임직원들도 착잡하기는 마찬가지다.
『누가 뭐래도 우리 경제를 이만큼 끌어온 것은 기업하는 사람들이 흘린 땀 때문 아닙니까.』 10대그룹에 드는 한 기업의 중역은 『요즘 밖에 나가면 친지들로부터 「당신네 회사는 얼마 줬느냐」는 물음을 받을 때가 가장 곤혹스럽다』며 『기업이 비판받을 것은 받아야겠지만 일방적으로 매도당하는 양상이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입사 초년병들 사이에서는 『그래도 대기업에 들어갔다고 으쓱했었는데 요즘 같아서는 일할 맛이 안난다』는 푸념도 나오고 있다. 올들어 부도업체수가 이미 1만개를 넘어서고,엔저(低)로 일본제품에 밀리고 있으며,무엇보다 나라 경제 전반이 하강국면에 접어든 시점에서 비자금 사건이 터졌다는 것 자체가 무척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전경련 관계자는 『수사도 중요하지만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말했고,무역업계 관계자는 『선진국에선 유례가 없는 이같은 일을 경쟁 외국업체들이 악용할 경우 상당한 타격을 받을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중소업계는 모기업의 타격이 하청업체로까지 불통이 튀는 것을 무척 걱정하는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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