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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암고 바둑 동문기사 단수 총 500단 넘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3일 오후 6시 서울 중구 조선호텔 1층 그랜드 볼륨에선 이색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이날 행사의 타이틀은 ‘충암동문기사 500단 돌파기념 축하연’-. 내용인즉 자타가 공인하는 바둑의 명문 충암 학원출신 프로기사들의 총 단수가 500단을 넘어선 것을 자축하는 자리였다. 현재 충암 출신 프로기사는 1971년 국내 최초로 바둑부 창설 이래 73년 ‘동문프로 1호’로 입단한 정수현 9단(현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을 비롯해 유창혁 9단, 이창호 9단, 박영훈 9단, 박정상 9단, 최철한 9단 등 국내 최고의 승부사들에다 지난달 입단한 고3생 한웅규 초단까지 모두 100명. 이들은 93년 6월 단수 합 100단이란 쾌거를 이룩한 이후 99년 2월 200단, 2003년 7월 300단, 2005년 7월 400단에 이어 지난 해 11월 마침내 500단의 위업을 세웠다. 그 후 14명이 승단한데다 한초단의 입단으로 현재는 모두 515단.

이날 행사에서 ‘영광의 주인공’들은 단상에 올라 한사람씩 소개되며 300여명의 축하객으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이날 프로기사들 못지않게 가슴 벅차해 한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다. 열렬한 바둑 팬으로서 바둑부를 창설하고 37년간 물심양면으로 이들을 지원해 지금 같은 금자탑을 이루게 한 충암 학원 이홍식(67)이사장이 바로 그이다. 이른바 ‘충암사단’을 이끌고 있는 ‘사단장’이 충암동문기사회장인 허장회 9단이라면 그는 ‘총장’쯤, 아니 ‘대부’란 별호가 어울리는 인물.

그래서일까, 그가 이날 “이렇게 뜻 깊은 자리를 마련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영광스럽고 자랑스럽게 생각 한다”고 축사를 하자 제자인 프로기사들은 물론 모든 참석자들이 열광적인 박수갈채로 화답했고, “앞으로 한국 바둑계를 넘어 세계 최강의 한국 바둑을 널리 떨치는 그 날까지 응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할 때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술잔을 들어 묵언의 다짐을 함께 했다. 이 이사장은 이날 모처럼 2차까지 하며 대취했다.

그리고 이틀 뒤 그는 학교에 있었다. 마침 스승의 날이라 1층에 있는 그의 사무실엔 초ㆍ중ㆍ고 학생대표들이 가져온 카네이션꽃바구니가 놓여있었다. 평소 말수가 적고 근엄한 표정의 그이지만 흥에 겨웠던 500단 돌파 잔치에 이어 잇따라 제자들한테 축하를 받은 까닭인지 다소 상기된 얼굴이다.

-다시 한 번 프로기사 100명에 500단 돌파를 축하드립니다.

“축하받을 일이긴 한데 제가 뭐 한 일이 있어야죠. 저는 그저 그 애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해준 것뿐이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걔들이 스스로 알아서 공부하고, 스스로 이룩한 거예요.”

-한국바둑계에서 충암 바둑의 위상은 어느 정도입니까.

“한국기원 소속 프로기사가 모두 229명인데 우리 출신이 100명이니 두 명중 한 명꼴(정확히 43.6%)이고, 전체 단수를 합친 것도 1194단 중 515단으로 비슷(43%)합니다. 이들이 그동안 딴 타이틀 개수만 219개에 이릅니다.”

-한마디로 ‘충암’자를 빼면 쓰러지겠군요. 구체적인 내용은요?

“입신(入神ㆍ9단)이 20명, 그리고 좌조(坐照ㆍ8단) 6명, 구체(具體ㆍ7단) 10명, 통유(通幽ㆍ6단) 11명, 용지(用智ㆍ5단) 9명, 소교(小巧ㆍ4단) 11명, 투력(鬪力ㆍ3단) 8명, 약우(若愚ㆍ2단) 13명, 수졸(守拙ㆍ초단) 12명 등입니다.”

-입신은 누구누구입니까.

“바둑장학생 1호인 허장회(고 3회)와 1호 입단자인 정수현(고 4회)을 비롯, 정대상(고 5회) 조대현(고 7회) 강만우(고 7회) 최규병(초 7회) 양재호(고 11회) 유창혁(고 15회) 김승준(고 20회) 이상훈(고 21회) 윤현석(고 22회) 이창호(고 23회) 윤성현(고 24회) 김성룡(고 24회) 안조영(중 28회) 조한승(고 30회) 박정상(고 32회) 최철한(고 33회) 원성진(고 33회) 박영훈(고 33회) 등입니다.”

-여기사도 많죠?

“조혜연(7단ㆍ중 34회) 김혜민(5단ㆍ중 35회) 현미진(4단ㆍ여중 8회) 이다혜(3단ㆍ중34회) 김은선(3단ㆍ중 36회) 김세실(2단ㆍ중 36회) 김수진(2단ㆍ중 36회) 고주연(2단ㆍ중 37회) 백지희(초단ㆍ중 34회) 최동은(초단ㆍ중 37회) 이슬아(초단ㆍ중 39회) 등 11명입니다.”

한국바둑은 1955년9월5일 한국기원 출범을 시작으로 현재 ‘바둑 인구 1000만 명’으로 통칭될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양적 성장뿐만 아니라 주지하다시피 질적인 면에서도 일본ㆍ중국을 능가해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고 있다. 이 같은 발전은 고(故 )조남철 9단으로 대표되는 1기, 김인 9단과 윤기현 9단, 하찬석 9단이 이끌었던 2기, 73년 김인에게서 최고위 타이틀을 따낸 뒤 80년,82년 천하통일을 이뤘던 조훈현 9단과 이에 맞서 이른바 ‘조-서 시대’를 풍미했던 서봉수 9단의 3기, 그리고 유창혁, 이창호를 필두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4기로 구분된다. 그런데 1기부터 3기까지가 일본 유학파(서봉수는 제외)들에 의해 주도된 반면 4기는 순수 국내파로 확연히 구분된다. 다시 말해 한국바둑의 참된 홀로서기가 4기에 이르러서야 이뤄졌다는 말이다. 여기서 ‘충암 바둑’의 위상이 다시금 높다랗게 보이는 것은 바로 4기를 이끌고 있는 주축이 바로 이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88년 유창혁 9단,이창호 9단,최규병 9단,양재호 9단 등이 주축이 돼 만든 ‘충암연구회’는 한창이던 유ㆍ이 9단이 바둑발전을 위해 자신들의 ‘비밀병기’까지 드러내놓으면서 한국바둑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데 기여했다. 충암연구회는 이후 많은 동문들이 모여들면서 지금은 ‘소소회(笑笑會)’로 이름을 바꿔 활동중이다.

-처음 바둑부를 두게 된 계기는 뭡니까.

“학교 문을 연지 4년 만인 70년에 설립자인 선친(李仁寬)께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졸지에 제가 학교를 맡아 운영하게 됐어요. 그러던 중 71년 11월 어느 날 우리 학교 인근에 살던 고(故) 김수영 사범이 찾아와 ‘한 번 프로기사를 길러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합디다. 저도 바둑을 좋아하는데다 선친께서 무척 무서운 분이셨는데 바둑을 함께 두면서 부자간 사이가 좋아졌던 기억도 있고 해서 선뜻 받아들여 바둑부를 만들었습니다. 김 사범이 지도를 맡고 조남철 선생도 반년동안 수고를 해주셨죠. 당시 김 사범의 추천으로 그해 고교바둑대회 우승자인 원주고 1년생 허장회를 스카우트해오기도 했습니다.”

-바둑실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명색은 현재 아마추어 7단인데 이창호한테 5점을 접고도 판판이 집니다. 그래도 그 친구는 간혹 져줄 때도 있는데 유창혁은 피도 눈물도 없습니다.(웃음)”

-정착은 쉽게 됐나요?

“소문을 듣고 이듬해부터 실력 있는 프로지망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어요. 당시 고교 1년생이던 김동면 8단이 중앙일보사가 주최한 제5회 학생왕위전에서 2위를 차지해 1위 김일환, 3위 백성호(이상 모두 현재 9단)와 함께 그 해 8월 대만에서 열린 한ㆍ중ㆍ일 고교바둑대회에 참가해 우승을 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다 73년 정수현이 프로에 입단하고 허장회가 고3때인 73년부터 네 차례 잇따라 아마국수전을 휩쓴 데다 76년 조대현ㆍ강만우ㆍ문용직 등 우리 학교선수들이 학생왕위전을 독식한 뒤 한ㆍ중전에서 우승을 함으로써 바둑명문이란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 덕에 제가 한국기원 이사가 되기도 했죠.”

-결과적으로 중앙일보사 덕을 많이 본 셈이네요.

“물론이죠. 당시 떠오르는 별들은 대부분 학생왕위전 출신으로 오늘날 같은 한국바둑의 발전을 가져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분명합니다.”

-참,한ㆍ중고교대회를 통해 대만의 실력자들도 알게됐다면서요?

“76년 대회 때였습니다. 당시 장제스(蔣介石)총통의 오른팔이던 저즈우러우(周至柔)가 그 쪽 이사장,잉창치(應昌期)가 부이사장이었어요. 그분들이 우리를 맞아 데리고 간 곳도 장총통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이 간여하던 대만 그랜드호텔이었는데 이사장 옆에서 예쁘장하게 생글거리며 명함을 돌리던 공보부 국장이 나중에 총통이 된 리덩후이(李登輝)란 인물이었습니다.”

-한국기원 이사장도 하셨죠?

“서슬이 시퍼렇던 5공초기인 82년11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지냈습니다.”

-어려우셨겠어요.

“그 땐 한국기원이 고작 4억정도 예산으로 꾸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조훈현이 상금으로 5000만원을 쓸어갔으니 어려울 수 밖에요. 그런데 어느날 기적같은 일이 생겼습니다. 88체육관에서 KBS주최 바둑대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불쑥 전두환대통령이 찾아온 거에요.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 무소불위이던 대통령이 들러 격려하고 나니 기전규모도 커지고 그동안 바둑계 안팎에 있었던 문제들이 일거에 해결되더군요. 언젠가 전대통령을 만나면 고마웠다는 말이라도 전할 참입니다.”

-관사에서 바둑부 학생들과 함께 생활했다면서요?

“허장회,유창혁,윤현석,김영환 등 95년 관사를 허물 때까지 늘 4~5명이 우리 식구와 함께 생활을 했어요.”

-유창혁은 어땠습니까?

“예의바르고 성격도 좋은데 바둑공부는 정말 독하게 했어요. 천장에다 자기의 결심을 써붙여놓고 자기전에도 마음을 다잡을 정도였습니다. 다른 애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줬습니다. 그래서인지 유창혁이 입단했을 때 정말 기뻤습니다.”

-이창호는요?

“초등학교때 조훈현사범이 데리고 와 우리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바둑실력도 이미 대단했지만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맘쓰는게 어른같았죠. 학교공부도 잘 해 늘 중상이었습니다. 아마 바둑말고 일반공부를 했더라도 틀림없이 대성했을 겁니다.”

-특기생들을 관리하는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저는 누구나 한 가지만 잘하면 된다는 주의예요. 그래서 애초부터 수업에 구애받지 않고 각자 알아서 연구해서 프로에 입단하고 대회에 출전해 실력을 검증받도록 했어요.”

이 이사장은 ‘바둑의 대부’이전에 교육자이다. 서울대 화학과출신으로 66년부터 3년간 이 학교에서 화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교육관은 이처럼 독특하다. 제도권 교육은 초등학교로 충분하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한마디로 조기전문화교육주의자이다. 하기 싫어하는 공부를 억지로 시키지 말고 바둑이건 운동이건 음악이건 요리이건 학생이 좋아하는 걸 하도록 옆에서 도와주어 세계적 첨단두뇌로 키우자는 주장이다. 이 같은 교육이 성과를 내려면 자기주도학습이 절대적이다. 충암은 이미 80년부터 일반학생들에게도 이 학습방법을 도입, 시행해오고 있다. 아이디어는 물론 바둑 특기생을 키우면서 얻었다.

-역으로 충암이 바둑 명문이 된 것도 자기주도학습의 결과라고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일단 프로에 입단하면 스승이 없이 혼자서 연구해야 하는데 이미 이 같은 습관이 몸에 뱄기 때문에 훨씬 유리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전인교육을 내세우는 교육제도와는 어긋나는데요?

“한국인은 통상 좋은 머리를 타고 납니다. 그런데 상급학교 진학용으로 주입식 교육만 받다보니 망치고 맙니다. 학생 스스로 뻗어나가도록 격려하고 지원하면 되는데 선생이 막고, 제도가 방해하고….그러면 개성도, 발전도 없습니다. 바둑을 보세요. 우리가 열린 교육을 하다 보니 10여년 만에 세계를 잡고 있잖아요. 다른 분야도 열린 교육을 하면 세계적인 인재를 키워내는 건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영화배우 안소영, 개그맨 이휘재ㆍ김현철, 탤런트 차인표ㆍ김명민, 가수 홍서범ㆍ윤상ㆍ탁재훈 등 이곳 출신 연예인도 많은데 그것도 열린교육의 결과인가요?

“딱히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학생시절 끼를 죽이지 않은 건 어느 정도 교풍의 덕을 본 셈 아니겠어요?”

그는 바둑뿐만 아니라 젊은 시절 야구와 배구에도 손속이 있었고, 특히 골프는 한때 싱글을 칠 정도로 만능 스포츠맨이다. 거기에다 지금도 소주 두 세병은 거뜬히 비울 정도로 호방하다. 그는 말한다. 충암이 있고 교풍이 이어지는 한 바둑은 1000단, 만단 이어질 거고, 머지 않아 월트 디즈니ㆍ빌 게이츠 같은 인물(둘 다 이창호ㆍ유창혁처럼 대학졸업장이 없다)이 나올 거라고-.

이만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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