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시오니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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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20세기 최대 시인으로 꼽히는 T S 엘리엇의 작품 가운데 『칵테일 파티』라는 희곡이 있다.이 작품에서 여주인공 셀리아는사랑에 실패하고 환상에서 깨어나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이렇게 넋두리한다.
『모든 잘못은 내게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요.만약 내게 잘못이없다면 이 세상이 잘못됐다는 것인데 그건 더 무서워요.차라리 내게 잘못이 있다고 믿어야만 올바로 될 수도 있을 것 아니겠어요.』 유대교의 본질을 이야기할 때 흔히 인용되는 대목이다.세상을 살아가다 뭔가 잘못되면 사람의 생각은 두가지로 나뉜다.하나는 하늘의 잘못이요,다른 하나는 인간 자신의 잘못이다.탓을 하늘에 돌리면 인간의 힘으론 어쩌지 못하지만 인간의 탓 으로 돌리면 하늘의 뜻에 기댈 수 있다는게 유대교의 본질이다.유대인들은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그들의 생활중심에 두고있기 때문에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도,죽음의 골짜기가 아무리 깊고 험해도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유일신(唯一神)주의를 고수하면서 그들이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하느님」의 개념을 만들어내려 노력해온 것도 그 까닭이다.그리스나 로마의 신들이 다소 비도덕적 경향을지니고 인간에 대한 관심이 희박하다면 유대인들의 하나님은 위대하고 거룩하며 사랑으로 충만한 신이라는 게 그들의 자랑이다.
유대인과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뜻을 이행하는 유일한 도구로 하느님에 의해 선택됐으므로 반드시 그 의무를 져야 한다는 게 바로 「시오니즘」의 핵심이다.유대교가 시오니즘을 떠받치는 정신적기둥이라면 키부츠(공동집단농장)와 국방군은 그 기둥을 지탱케하는 현실적인 요소인 셈이다.
각국의 유대인 추방.말살정책이 시오니즘 등장의 배경이라면 시오니스트들이 1948년 팔레스타인을 내쫓고 그 땅에 이스라엘공화국을 세운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만하다.하지만 라빈총리의 부단한 노력으로 팔레스타인과 공존의 화해무드가 조성되고 중동평화의 싹이 트나보다 싶었는데 총리 피살로 다시금 시련을 겪게 됐다.극우 시오니스트들이 신봉하는 하느님의 뜻은 분명 아닐터인즉 시오니즘에 대한 본질적 비판도 감수해야 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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