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억 재산가 80일 납치돼 110억 뺏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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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부동산 임대업을 하는 김모(53·서울 도곡동)씨는 지난 3월 1일 대학 동창인 이모(53)씨로부터 ‘술 한잔 하자’는 연락을 받고 압구정동의 식당으로 갔다. 김씨 소유의 경기도 용인의 토지(시가 210억원)를 20억원 비싸게 사줄 사람이라며 이씨에게서 소개받았던 김모(50)씨도 있었다. 식사를 한 뒤 땅을 사겠다는 김씨의 벤츠 승용차를 타고 함께 이태원의 한 술집으로 이동하던 중 이씨는 음료수를 사오겠다며 갑자기 차에서 내렸다. 잠시 후 뒷문이 열리고 정체불명의 두 남자가 차에 올라탔다. 김씨는 이후 80여 일간 집에 돌아올 수 없었다. 납치·감금됐기 때문이다.

서울 수서경찰서는 수백억원대의 재산가인 김씨를 2개월여 동안 감금하고 110억여원을 빼앗은 혐의(인질강도)로 이씨에 대해 21일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이씨는 지난해 약 5개월간 김씨의 아파트에서 함께 생활하며 김씨가 부인과 이혼한 후 함께 사는 가족이 없어 집을 비워도 알아채기가 어렵다는 점을 이용해 납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납치된 김씨는 여동생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수사에 나서면서 풀려날 수 있었다. 지난 12일 김씨의 여동생은 “혼자 사는 오빠가 집을 오래 비운 데다 다른 때와 달리 아침에 자주 전화를 하는 게 이상하다”며 경찰에 신고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김씨의 금융거래 내역을 조사해 부동산을 담보로 78억원이 대출된 사실을 확인하고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주범 김씨는 지난달 24일 납치된 김씨인 것처럼 위장해 제2 금융기관에서 불법으로 대출을 받았다. 그 다음날에는 김씨 명의로 된 예금 30억원이 주범 김씨의 계좌로 이체됐다.

경찰은 휴대전화를 추적한 결과 김씨가 강남 일대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수사가 계속되자 압박을 느낀 이들은 20일 도곡동 집 근처에서 김씨를 풀어줬다. 당시 김씨는 3~4일간 마약을 맞아 환각 상태였다. 경찰 관계자는 “이씨 등은 ‘신고하면 너도 마약사범으로 경찰에 붙잡힐 것’이라고 김씨를 위협해 신고를 막으려 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김씨를 풀어준 당일 경찰에 자수했다. 이씨는 “김씨를 유인했을 뿐 감금에는 가담하지 않았다”고 범행 일부를 부인하고 있다고 경찰은 전했다. 그러나 김씨를 감금한 이들이 빼냈던 현금 중 10억원은 이씨의 통장에 입금돼 있는 상태라고 경찰은 설명했다.

경찰은 김씨를 감금했던 주범 김모씨는 이달 15일 필리핀으로 출국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주범 김씨를 비롯, 범행에 가담한 7~8명의 행방을 쫓고 있다. 또 계좌 추적 등을 통해 김씨가 빼앗긴 100억원의 소재를 파악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박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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