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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Style] 악녀 예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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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기존의 드라마에서 악녀들은 ‘비호감’을 넘어 경계 대상 1호였다. 하지만 요즘은 사정이 좀 달라졌다. 이제 예능프로그램의 대세는 ‘악녀 우대’다. 악녀의 발톱과 송곳니는 슬쩍 은폐되고 그들의 이미지를 ‘귀여움’으로 포장하는 분위기다. 악녀 신드롬의 무한성장은 된장녀 신드롬과 시너지를 일으켰다.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은 악녀 신드롬의 중심에는 ‘패리스 힐튼 따라잡기’라는 여성들의 로망이 자리 잡고 있다. MBC ‘우리 결혼했어요’와 Mnet ‘서인영의 카이스트’에서 보이는 서인영의 귀여운 악녀 이미지야말로 한국판 패리스 힐튼의 결정판이다. 최근 종영한 SBS ‘온에어’의 오승아(김하늘)에 이어 28일부터 방영될 KBS ‘태양의 여자’의 신도영(김지수)도 마찬가지다.

◇귀여운 악녀, 한국판 패리스 힐튼=말이 ‘따라잡기’지 보통 사람들이 패리스 힐튼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23번째 생일날 그녀는 LA~도쿄~런던~뉴욕~라스베이거스를 순회하며 생일 파티를 했다. 패리스 힐튼의 정체성은 패션에서 완성된다. 그러나 그녀의 화려한 페인트 모션에 속아서는 안 된다. 그녀의 정체성은 패션이 아니라 ‘상속녀’라는 직함에서 우러나온다. 그녀는 재능으로 스타가 된 것이 아니라 마치 ‘상속녀’가 ‘직업’인 듯한 착시효과로 주목받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판 패리스 힐튼을 꿈꾸는 스타들의 이미지는 어떨까. 내면과 외면이 완벽히 일치하는 패리스 힐튼의 한없이 투명한 삶과는 달리, 한국판 패리스 힐튼의 삶은 나름대로 고충이 많다. MBC ‘환상의 커플’에서 조안나(한예슬)는 초호화판 상속녀의 삶을 멋들어지게 과시하지만 항상 정서적 결핍에 시달린다. “열두 살 이후 내 주변엔 온통 마음을 나누자는 사람으로 들끓었어. 그런데 사람들한테 마음을 열어주니 화를 내더군. 자기가 보인 진심에 왜 보답하지 않느냐고. 그럴 때 마음 대신 지갑을 열어주면 어찌나 기뻐하던지.”

◇노골적 된장녀 라이프스타일=‘온에어’의 오승아에서 서인영으로까지 진화한 2008년 버전의 한국판 패리스 힐튼은 좀 더 노골적인 된장녀의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한다. 오승아는 자신이 국민 요정이라는 것을 한순간도 잊지 않은 나머지 천하무적 안하무인이다. 다른 배우와 공동 수상이 결정되자 그녀는 야멸차게 수상을 거부한다. “대상에 공동이 어딨어? 이게 개근상이야? 선행상이야?” 그러나 미워할 수 없는 그녀의 매력은 그녀의 인기에 정확히 비례하는 시선의 폭력을 견디는, 눈물겨운 씩씩함이었다.

쥬얼리의 서인영은 ‘신상녀’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신상(품)을 밝히는 순도 99.9% 된장녀 이미지로 주목받는다. ‘서인영의 카이스트’는 2003년 폭스사에서 방영되어 패리스 힐튼을 스타덤에 올려놓은 ‘심플라이프’를 공공연히 패러디한다. ‘평범한 사람들 틈에 낀 초화화판 상속녀의 좌충우돌’이라는 컨셉트가 ‘비범한 범생이들에 틈에 낀 악동 연예인의 산전수전’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공식 청강생’ 직함으로 카이스트에 잠입한 서인영은 학교 곳곳을 누비며 카이스트의 엄숙한 이미지에 균열을 낸다. 책방에서 수업 교재 대신 수입 패션잡지를 10여 권이나 사들이고, 수업시간에는 지각과 낮잠 전법으로 대처하며, 잔디밭에서 게임을 하자고 하면 “내가 아끼는 비싼 구두에 진흙 튀는 꼴은 볼 수 없다”며 줄행랑을 친다.

◇속물성이 솔직함의 미덕으로=이렇듯 악녀들을 ‘귀엽게(?)’ 만든 힘은 단지 된장녀 신드롬 탓이 아니다. 남자의 재산에는 관심 없고 오직 사랑에만 목숨 거는 캔디렐라(캔디+신데렐라)의 시대가 가고 신상(품)과 명품을 노골적으로 밝히는 속물성이 오히려 ‘솔직함’이라는 미덕으로 추앙받는 시대가 도래한 덕분이다. 캔디렐라의 위선도 미덕은 아니지만 ‘신상, 신상!’을 외치는 된장녀 또한 모두의 역할 모델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여자를 착하고 예쁘게 길들이려는 남자들의 욕망에 포획되지 않는 구시대적 악녀들은, 제도나 가족이 품어 안을 수 없는 ‘영원한 타자’로서의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한국판 패리스힐튼의 최신판인 서인영의 필살기는 ‘악녀 근성’이 아니라 신상 구두와 각종 이벤트로 길들일 수 있는, 품에 쏙 안길 듯한 ‘귀여움’과 ‘애교’다.

된장녀들을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사회는 위선적이다. 여성의 가방과 옷차림으로 그녀의 계급적 위치를 점치는 사회의 시선이 변하지 않는 한, 된장녀에 대한 동경은 사라질 수 없기 때문이다. 서인영으로 대표되는 한국판 패리스 힐튼의 귀여운 악동 이미지. 그것은 1990년대에 유행했던 팜므파탈 캐릭터에서 야생성과 공격성을 제거하고 된장녀의 캐릭터를 잔뜩 섞은 문화적 합성품이다.

MBC ‘무릎팍도사’에서 노사연은 ‘다시 태어나면, 온몸을 성형해서, 매우 문란하게, 막 살아보고 싶다!’는 고백으로 시청자들의 배꼽을 잡게 했다. 그녀의 고백은 유머의 탈을 쓴 슬픔이었다. 모두가 주목하는 화려한 스캔들 메이커이고 싶은 욕망이야말로 여성들의 억압된 로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삶을 가질 수는 없다. TV에서 범람하는 ‘귀여운 악녀’ 이미지는 우리 시대 평범한 여성들의 슬픔으로 제조된 비료를 먹고 무럭무럭 자라는, 신종 생명체가 아닐까.

정여울 <문화평론가>

드라마 속 악녀에게 배울 점

언제부터인가 할리우드 영화나 드라마에서 흑인과 여성 대통령이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실제로 미국 정치권에 유력한 흑인과 여성 대통령 후보가 등장했다. 예전에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영화와 드라마 덕에 과거라면 거부감이 컸을 인물들이 익숙하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귀여운 악녀의 경우도 그렇다. 현실에서도 비슷한 부류에 대한 거부감이 크게 준 반면 오히려 주목받고 있다. 그렇다면 귀여운 악녀 캐릭터를 사회 생활에 활용해보는 것은 어떨까?

1. 부당한 대우는 참지 마라=부당한 대우를 묵묵히 견디다 보면, 상대방이 더한 요구를 해올 때가 있다. 반면 귀여운 악녀들은 시의적절한 불평을 던져 대접받는 법을 잘 안다. “참는다고 남는 건 없다. 오히려 불평을 해야 주목 받고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다.” 『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의 저자 남인숙(34)씨의 조언이다. 다만 어느 선까지 참을 것인가에 대한 한계와 기준은 미리 세워두자. 그리고 간접적인 어법을 이용해서 합리적인 요구를 하는 것처럼 보이게 해야 한다.

2. 적당한 생떼는 애교=구두를 사달라며 “신상!(신상품의 약칭)”을 외치는 서인영에 대해 남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단순히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어’라거나 ‘남자를 이용하는 여자군!’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문화평론가 김헌식(34)씨는 “남자들은 자신의 힘으로 남을 기쁘게 해주는 것을 즐기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실은 악녀가 남자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있을 뿐이라는 얘기다. 상대가 요구를 들어주거나 선물을 건넸다면, 서인영이 한 대로 하라. 무조건 크게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에는 더 큰 것을 얻게 된다.

3. 예측 불가능한 사람이 되라=일관성이 없거나 갑작스러운 말과 행동은 상대방을 두렵게 한다. 귀여운 악녀도 그런 부류다. 예측할 수 없는 언행으로 상대의 기를 죽인다. 역사상 가장 변덕스러웠지만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미술가인 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말도 같은 맥락이다. “최고의 계산은 계산을 하지 않는 것이다. 변덕스럽게 행동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물론 직장 상사에게 이 전략을 적용하는 데는 주의해야 한다. 자칫 우유부단하고 정신적 문제가 있는 부하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있다.

4. 실력·외모는 기본=주목받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세상이다. 따라서 외모를 포함해 자기 관리에 더 신경 써야만 한다.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스타일과 이미지를 만들어내야 한다. 귀여운 악녀들이 성공하는 것은 악녀여서라기보다는 귀여워서다. 이렇게 화법과 외모를 다 갖췄다고 귀여운 악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진짜 어려운 대목은 패리스 힐튼처럼 자신의 계산을 능청스럽게 감추는 것이다. “교활하지만, 교활하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도록 하라. 가장 큰 교활함은 그것을 감추는 데서 비롯된다.” 스페인의 소설가 벨타사르 그라시안(1601-1658)의 말 그대로다.

이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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