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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호성 … 탄식 … 추억 쌓인 83년 동대문 축구장 우리 곁 떠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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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14일 동대문운동장 축구장 철거를 기념하는 ‘굿바이 동대문운동장’ 행사가 열렸다. 운동장 북측 전광판 시계가 대형 크레인으로 철거되고 있다. [사진=김성룡 기자]

1976년 9월 11일 제6회 박대통령컵(박스컵) 국제축구대회가 열린 동대문운동장(당시 이름은 서울운동장) 축구장.

한국 대표팀은 말레이시아와의 A조 첫 경기에서 후반 7분을 남겨놓은 상황에서 1-4로 뒤져 패색이 짙었다. 이때 갑자기 차범근(수원삼성 감독) 선수가 상대 골문으로 돌진해 추격골을 터뜨렸다. 차범근은 4분 뒤 두 번째 골을 넣더니, 종료 1분을 남겨놓고는 미드필드에서 상대 선수의 공을 뺏은 뒤 단독 드리블 끝에 동점골까지 넣었다. 동대문운동장 일대는 팬들의 함성으로 떠나갈 듯했다. 불과 6분 사이에 혼자서 세 골을 넣은 이 장면은 한국 축구사에 길이 남을 기억이다.

83년간 한국 스포츠사에서 깊은 족적을 남기며 시민들과 동고동락했던 동대문운동장이 마침내 작별을 고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서울시는 14일 오후 축구장에서 ‘굿바이 동대문운동장’이란 이름으로 고별행사를 열고, 본격적인 철거작업에 들어갔다.

행사에는 오세훈 서울시장, 박주웅 서울시의회 의장, 나경원 한나라당 의원, 홍명보 올림픽대표팀 코치 등이 참석, 축구장의 마지막을 기념하는 의미로 ‘굿바이 슛’세리머니를 펼쳤다.

야구장은 이미 지난달 중순 철거를 마쳤으며, 축구장은 6월 말 철거 완료된다. 운동장 터에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들어서 서울의 패션 및 디자인의 중심지로 거듭나게 된다.

◇83년을 시민과 함께=1925년 10월 한국 최초의 종합경기장으로 경성운동장이 문을 열었다. 암울했던 식민지 시절이었지만 시민들은 큰 경기가 열릴 때마다 운동장을 가득 메우고 가슴에 맺힌 울분을 털어냈다. 특히 서울과 평양의 대표팀이 맞붙는 경평축구 대회가 인기였다. 경성팀에선 보성전문의 김용식 선수가 빠른 발과 발재간으로 이름을 날렸다.

당시 야구장은 영화 ‘YMCA 야구단’(2002년)에 나오는 모습처럼 담장이나 관중석이 제대로 설치되지 않은 간이구장이었다. 야구선수로는 28년 첫 홈런을 때린 연희전문의 이영민 선수가 유명하다.

해방 후 서울운동장으로 이름을 바꾼 뒤에는 우익과 좌익 단체들의 대규모 군중집회 장소가 됐다. 백범 김구 선생과는 각별한 인연이 있다. 45년 12월 백범의 귀국을 환영하는 집회와, 49년 7월 백범의 장례식이 모두 여기서 거행됐다.

서울시는 55년부터 3년간 야구장 보수공사를 벌인 뒤 58년 9월 야구장을 다시 열었다. 이후 60~70년대 서울운동장은 명실상부한 한국 스포츠의 중심이었다. 72년 황금사자기 결승에서 펼쳐진 군산상고의 역전극은 아직도 올드 야구팬의 머릿속엔 잊을 수 없는 명승부로 남아 있다. 당시 군산상고는 부산고에 1-4로 뒤지다 9회말 한꺼번에 4점을 뽑아 5-4로 승부를 뒤집었다. 이 외에도 박대통령컵 국제축구대회와 고교야구 결승전, 월드컵 예선전 등이 열리면 장안이 떠들썩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동대문운동장의 퇴장=‘86 아세안게임’과 ‘88 올림픽’을 앞둔 84년 잠실종합운동장이 생기자 서울운동장은 동대문운동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스포츠의 중심에서 조금씩 멀어져 갔다. 축구장은 2003년 청계천 노점상들을 수용하면서 경기장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야구장도 지난해 가을 시즌을 끝으로 더 이상 경기를 열지 못했다.

서울시는 2010년까지 3758억원을 들여 운동장 자리에 DDP를 짓기로 했다. DDP는 비스듬하게 경사진 2층짜리 건물로 윗부분에는 공원을 조성하게 된다. 체육시민연대를 포함한 상당수 체육인들은 “동대문운동장은 한국 스포츠의 역사이자 체육인들에겐 마음의 고향”이라며 철거에 반대하기도 했 다.

2003년부터 축구장에서 장사하던 풍물벼룩시장 입점 상인 900여 명은 지난달 말 개장한 신설동 서울풍물시장으로 옮겨갔다.

글=주정완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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