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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정치'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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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보균
박보균 기자 중앙일보

"국회의사당을 불 태우고 싶다." 탄핵 규탄 촛불집회 한쪽에서 나오는 분노의 소리다. 초선 의원 시절 노무현 대통령도 그런 격한 감정을 지닌 적이 있었다. 5공 청문회에서 스타가 된 다음해 봄인 1989년 3월. 청문회의 법적 마무리가 집권당의 반대로 흐지부지될 무렵이다.

그는 사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회가 국민 전체를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 국회 주변이 로비의 그림자로 꽉 차있다. 의사당에 불을 지르고 싶다." 그가 의원직 사퇴서를 낼 때쯤이다. 그러면서 그가 의회정치의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대중투쟁이었다. 국회를 제치고 국민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15년 뒤 탄핵 정국. 盧대통령이 마음 속에 그렸던 그림이 실제 장면으로 현란하게 펼쳐지고 있다. 넘실대는 촛불 사이에서 보이는 국회는 불타고 있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던졌던 의원직 배지를 도로 줍고 있다. 직접민주주의.시민혁명론이 기세를 올린다. 그런 것을 지켜보는 盧대통령의 심정은 무엇일까.

거센 탄핵역풍은 밑바닥 민심 덕분이다. 거기엔 약자 동정론이 짙게 깔려 있다. 힘세고 타락한 국회가 약한 대통령을 쓰러뜨렸으니 불쌍하다는 것이다. 약자 쪽에 한없는 연민의 정을 쏟는 게 다수 국민의 정서다. 강자가 타락했다면 미움은 더해진다. 약자가 비감에 젖은 듯하면 허물을 덮어주려 한다. 그런 대칭 구도가 민심에 형성되면 탄핵 논리가 아무리 정교해도 힘이 떨어진다. 국정운영의 포퓰리즘 논란, 일부 정책의 친북성향 시비는 뒷전에 밀린다. '부패한 국회가 탄핵할 자격이 있는가'라는 한마디가 위력을 발휘한다.

盧대통령은 민심의 그런 독특한 생리에 익숙하다. 대통령 권력은 가장 강력하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약자인 듯 묘사해 왔다. 그가 원칙과 철학을 내세우는 것은 비장함의 이미지 효과도 염두에 뒀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1년간 국정 혼선에다 잦은 말 실수의 행태는 여론 비판을 받았다. 그렇지만 한나라당과의 승부에 들어가면 盧대통령은 다르게 비춰졌다. 덜 부패한 약자에다 고독하고 결연한 모습으로 포장하면 한나라당과의 싸움에선 불패다. 盧대통령의 승부수에 담긴 간단한 원리다. 한나라당이 차떼기 강자의 낙인을 씻지 않는 한 盧대통령은 반전의 쾌감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외환 위기 때보다 고단한 삶을 사는 서민, 직장을 못 구해 좌절하는 청년들은 정권 비판 쪽에 가 있어야 정상이다. 서민 경제파탄의 기본책임은 국정을 운영하는 쪽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탄핵 정국에선 그들은 한나라당 반대 쪽에 더 많이 서있다. "국회가 정치싸움에 몰두하는 바람에 경제가 이 모양이 됐다"는 여당의 책임 전가가 먹혔기 때문이다.

그런 비정상은 한나라당에 대한 반감 탓이 크다. 국민은 참회의 굿판을 원했다. 찬바람 부는 데로 들어가 불법 대선자금에 대한 속죄의 눈물을 흘리는 한나라당의 모습을 보길 바랐다. 그러나 이회창 전 총재는 감옥에 들어가겠다는 성명서만 낸 채 사라지곤 했다. 성명서엔 법치의 고뇌가 담겼지만 국민의 기대치를 만족시켜 주지 못했다. 호텔 같은 당사에 남은 지도부의 모습은 뼈를 깎는 자성과는 멀어 보였다.

성난 민심을 달래려면 국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서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정치를 보여줘야 한다. 국민은 박근혜 대표의 한나라당이 얼마만큼 변했는지를 그런 쪽에서 따져보고 있다. 부패에서 결별하는 감동의 정치를 기대하고 있다. 그것이 한나라당 변화의 출발점이다.

박보균 정치.국제담당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