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e칼럼

왜 성공은 실패의 어머니인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008년 대한민국 권력 지도 감상기

권력은 유한하다. 그러나 권력을 쫓는 사람들은 무한하다. 그래서 파워 게임은 필연적으로 승패로 귀결된다. 그런데 승자, 즉 권력을 쥐게 된 이들의 욕망 또한 무한하다. 이로 말미암아 성공한 권력 대부분이 실패로 끝나고 만다. 지금 이 순간, 우리 국민들은 권력에 대한 이 만고불변의 진리를 체험하고 있다.

단순히 이번 대선과 총선 얘기가 아니다. 시계를 꼭 5년 전 지금으로 되돌려 보자. 어떤 권력의 지형도가 보이는가? 승리한 진보 진영의 환호성이 들린다. 보수 진영의 장탄식이 그칠 줄 모른다. 외환위기 와중에 탄생한 국민의 정부만 해도 일종의 일탈이라고 여겼던 그들이었다. 참여 정부 5년은 이렇게 승자와 패자를 명확히 가른 채 서막이 올랐다.

진보 진영의 오만과 독선도 바로 이 때부터 시작됐다. 1백년 진보 정권 같은 철없는 공언이야 애교로 치자. 대중과 시스템을 향한 대통령의 독설은 곤혹스러웠다. 대통령을 에워싼 386 세대가 주도하는 아마추어 리더십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들은 모든 것을, 끝까지 바꾸고야 말겠다는 신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선의(善意)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국민들이 이들의 무한 욕망을 용서할 수는 없었다. 국민과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더욱 더 그들을 미워하며 떨어져 간 것이 참여정부라는 권력이었다. 이것이 지난 대선과 총선, 진보 진영이 패배한 이유다. 다른 이유가 없다. 노무현 대통령이 다시 옛 장기를 발휘한다고 해서, 실패의 원인이 달라질 이유는 없다.

새로운 승자인 이명박 정부는 과연 참여정부와 다른 선택을 할까? 앞으로 더 두고 볼 일이다. 그러나 출범 몇 달이 채 안 지난 상황에서도 과거의 전철을 되풀이한다는 인상이다. 무엇보다 과거의 것이라면 모든 것을, 끝까지 바꾸려 든다. 그러면서 권력의 운용 행태는 참여정부 시절의 판박이다. 말은 섣부르며, 정책은 지나치다. 선의조차 의심스러운 경우가 많다. 승리에 대한 도취는 과거보다 심하면 심했지 모자라지 않다. 진보 권력 10년에 넌더리를 냈던 국민들조차 의아할 정도다. 이러다가는 틀림없이 성공한 권력의 실패를 맛보게 될 것이다.

◇성공이 불러오는 필연적 함정, 오만과 독선=성공과 실패의 필연적 순환은 새삼스러운 얘기는 아니다. 현대 경영학에서는 이를 하나의 법칙처럼 굳게 믿는 분위기다. 성공한 개인과 조직일수록 과거 자신의 성공을 이끈 성공 방정식에 집착한다. 그 결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워진다. 암기식 공부에 익숙해 빼어난 성적을 보였던 고등학생이 새로운 형태의 대학 교육에 적응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식이다. 이는 잘못될 가능성이 전무해보였던 IBM이나 씨티은행이 어떻게 경영 위기를 맞는지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사고의 틀로 보였다.

1990년 미국의 유명 컨설턴트였던 대니 밀러는 여기에 ‘이카루스의 패러독스’(Icarus' Paradox)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카루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장인(匠人) 다이달루스의 아들이다. 종신형에 처해진 부자는 날개를 만들어 탈출을 시도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하늘로 날아올랐다는 도취감에 아들 이카루스가 태양에 너무 가까이 다가갔던 것이다. 그는 결국 갈매기 깃털을 이어 붙인 밀랍이 녹는 바람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이런 경영학적 사고의 틀을 파워 게임에 대입하면 어떨까? 노무현 대통령을 생각해보자. 그는 정치인으로서 오랜 세월 지역주의와 싸웠다. 동시에 사심 없이 모든 것을 거는 승부사 기질이 다분했다. 이 두 가지 요인 때문에 그는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자 그의 장점은 고스란히 단점으로 변하고 말았다. 지역주의 청산에 대한 그의 집착이나승부사 기질은 모두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비쳐졌다. 모든 것을 걸고 싸우려고 하면 할수록 그는 국민과 더욱 멀어졌다. 정치인으로서 할 일인 권력 투쟁과 대통령으로서 해야 하는 국정 운영은 너무 달랐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자마자 그가 다시 인기를 얻는 것은 당연했다.

◇20세기 중후반 미국 정치의 파워 게임=비슷한 일이 미국 정치에서도 벌어졌다. 민주, 공화 양당 간의 집권사가 그랬다. 민주당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3연임(1933~1945) 이래 수십년 동안 경제적 포퓰리즘(populism)으로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 공화당 내의 부유층 지지 세력에 맞서 중산층과 서민을 한 데 묶는 전략이었다.

그런데 1960년대가 끝나갈 무렵 공화당에 기회가 돌아왔다. 이 당시 공화당 후보였던 닉슨은 사회적 포퓰리즘으로 맞섰다. 그 동안 민주당이 경제 엘리트를 공격했다면, 이 때부터 공화당은 사회 엘리트를 비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전략은 효과적이었다. 공화당은 정부의 지나친 과세를 공격했다. 닉슨 자신은 보수적 기독교계와 연대해, '침묵하는 다수'(Silent Majority)라는 개념으로 중산층을 끌어안았다. 중산층은 인종적 불안감과 이민에 대한 반발, 그리고 극단적 히피 문화에 대한 반감에 젖어들고 있었다. 이로써 기독교계와 중산층은 확실한 공화당의 지지 세력이 돼 주었다. 드디어 닉슨은 루스벨트에서 비롯돼 케네디와 존슨에 이르는 민주당 전성기를 마감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는 공화당 전성시대였다. 공화당은 감세와 낙태 금지, 범죄, 이민 규제 등 효과적인 사회 이슈를 발굴했다. 레이건 대통령 등장 후에는 경제 어젠다(agenda)까지 공화당이 선점했다. 감세와 정부 규제 축소, 그리고 공급 주도의 성장 잠재력 확충책으로 경제에 대한 자신감까지 되찾아 주었다. 루스벨트가 대공황으로부터 미국을 구출한 이래 경제는 민주당의 단골 이슈였다. 그러나 이제 경제라는 이슈는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당적을 옮겨 버렸다.

우리의 최근 정치사는 미국의 20세기 중후반 파워게임과 흡사하다. 물론 개혁 혹은 진보 진영의 집권 기간은 미국처럼 길지 않았다. 고작 두 번의 집권, 10년이다. 그러나 진보 진영이 경제적 포퓰리즘이란 집권 전략을 폈다는 점이 흡사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보수 진영이 사상과 가치를 내세운 사회적 포퓰리즘으로 맞섰다. 뉴라이트라는 이름으로 보수와 종교 단체가 그 흐름을 주도했다. 무엇보다도 보수 진영은 경제라는 이슈를 선점했다. 그것이 결정적 승인(勝因)이었다.

◇진보 진영의 약한 고리=친북, 보수 진영의 약한 고리=친일
진보 진영의 패인 가운데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중요한 것도 있다. 왜 진보 진영은 보수의 사상과 가치 공세에 밀렸을까? 통일 논리가 국민 정서를 지나치게 앞서 나갔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참여정부의 주역인 386 세대들은 80년대 한 때 친북 논리까지 수용했던 적이 있다. 독재 정권 하에서 시달렸던 국가적 정통성에 대한 컴플렉스 탓이었다. 국민의 정부 이후 추진된 대북 화해와 협력 정책은 분명 이와 무관했다. 오히려 경제적 계산이 전제된 실용적 성격이 더 강했다. 그러나 국민들로부터 오해를 받을 소지는 있었다. 진보 권력 하에서 보수 진영은 이 약한 고리를 효과적으로 공략했다. 좌파, 빨갱이라고 매도함으로써 국민적 거부감을 부추긴 것이다.

그렇다면 성공한 권력인 보수 진영의 약점은 없을까? 거기에도 진보 진영과 비슷한 약한 고리가 있다. 바로 친일 논리다. 보수 세력들은 통일보다는 건국이나 산업화를 더욱 중시해왔다. 좌익에 맞서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북한과 다투면서 산업화를 이룬 주역을 재평가하는 과정이 심화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건국 과정에서 일제를 청산하지 못한 일은 물론 일제 시대까지 미화하게 된다. 식민지 근대화론이 뉴라이트 교과서의 핵심이 되고, 식민지 근대화론자가 한나라당의 씽크탱크를 장악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과학적 근거를 통해 일제 시대의 산업화 과정을 밝히는 이론이다. 이 논리가 학문의 영역을 넘어 주장과 선동으로 발전하게 되면, 국민 일반의 정서와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대선과 총선을 거쳐 보수 진영은 10년만에 꿈에 그리던 권력을 획득했다. 승리에 대한 도취감은 만연하고, 권력 행사에 대한 의지는 끝간 데를 모를 정도이다. 그러나 잊지 말 일이다. 5년 전, 10년 전 승리한 진보가 그랬듯, 이 성공은 실패를 잉태하고 있다. 보수 진영이 선점했던 이슈인 경제가 빛이 바래거나 보수 진영의 이념가들이 지나치게 앞서나가는 순간 실패는 현실화 된다. 거듭되는 권력의 오류를 목격하는 국민들은 슬프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민주주의를 위한 중요한 학습 과정이다. 이념은 답이 될 수 없다. 이념을 위한 권력은 더더욱 그렇다는 사실을 깨우쳐가는 과정이다. 결국 현재 상황은 보수의 승리도, 진보의 위기도 아니다. 민주주의가 유일한 승자일 따름이다.

김방희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