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외환보유액, 국내서도 활용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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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지금 한국 경제에서는 역설적인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외환보유액은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고 있는데 국내 은행들은 외환이 모자라서 난리다. 3월 말 기준으로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2638억 달러다. 이를 활용하기 위해 한국투자공사(KIC)를 정식 출범시켰을 정도이니 외환을 ‘과다’하게 갖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가 악화된 이후 국내 금융기관들의 외화 자금난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미국·일본에서 자금조달이 안 되니까 말레이시아까지 나와서 외화를 빌리려고 한다. 이곳에서 만난 한 금융인은 국내 은행들의 단기차입금 급증에 대해 우려하는 외국 은행, 투자자들이 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한 이유는 정부가 외환보유액 사용에 대해 지나치게 경직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인 것 같다. 1997년 금융위기를 거친 뒤 정부는 금융기관들에 외환보유액을 빌려주던 관행을 없앴다. 외환보유액은 위기에 대비하는 비상금인 만큼 언제든지 쓸 수 있도록 ‘유동’자산으로만 갖고 있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우리가 ‘적정’ 외환보유액을 갖고 있을 때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과다’ 외환보유액을 갖고 있을 때에는 얘기가 달라진다. ‘과다분’에 대해서는 구태여 이 원칙을 적용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과다분은 좀 더 이익을 많이 낼 수 있거나 국민경제에 필요한 부분에 사용하는 것이 낫다.

그런데 정부는 ‘과다’ 외환보유액을 KIC를 통해 해외에 투자해 활용하는 길만 열어놓았다. 메릴린치은행에 20억 달러를 공격적으로 투자하기도 했다. 반면 외환보유액을 국내 금융기관들에 빌려주거나 국내에 투자하지는 않는다. 해외 투자는 위험도가 낮고 국내 투자나 대출은 위험도가 높기 때문이라면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현재 정책은 금융위기 때 금융기관들을 지원했다가 외환보유액이 바닥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겠다는 것 이외에는 특별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

현재 금융기관들이 외화난을 겪고 있는 것은 부실 때문이 아니다. 경상수지 흑자가 줄어든 데다 조선, 중공업체, 해외 펀드 자산운용사들의 선물 환매도를 받아주기 위해 외화를 많이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부실해지면서 부실채권이 쌓이고 이에 따라 외국계 은행들이 자금을 회수해 가던 금융위기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외환보유액도 어느 때보다 많아 외환위기를 걱정할 이유는 없다.

필자가 보기에는 외환보유액이나 KIC 자금의 일부를 국내 은행들에 빌려줄 수 있으면 누이 좋고 매부 좋으면서 국민경제에 도움이 된다. 외환보유액의 수익률을 높일 수 있고 은행들도 해외에서 비싸게 외화를 조달할 필요가 줄어든다. 금융기관들이 국내 금리를 끌어올려 국내 기업이나 개인들이 피해를 보는 일도 줄일 수 있다. 특히 은행들의 외화차입이 선물환매입에 따른 포지션 구축을 위한 것일 경우에는 위험도가 낮고 만기도 정해져 있기 때문에 돈이 묶일 염려가 별로 없다.

이런 현실을 구체적으로 따지지 않고 ‘국내’라는 이유만으로 외환보유액 활용을 무조건 금기(禁忌)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국부펀드들이 해외 투자를 하는 것은 대부분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다. 한국과 같이 국내 시장에서 외환 및 투자 수요가 많이 있는 나라에서는 이 수요도 적절히 활용해 외환보유액을 굴리는 것이 낫다.

현재 정부와 한국은행은 막대한 외환보유액을 쌓아놓고 낮은 금리의 미 재무성증권을 사든지 외국 투자은행에 비싼 수수료를 주면서 위탁운용까지도 한다. 그 와중에 국내 은행들은 해외에 나가 외화를 조달하기 위해 이리저리 손을 벌리고 다닌다. 내 돈 놓고 남의 돈을 비싸게 빌리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서글픈 광경이다.

신장섭 싱가포르 국립대학 경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