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일의 Inside Pitch Plus <60> 시련을 이겨낼 때 우리는 한번 더 강해진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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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호 26면

희뿌연 수증기 사이로 커다란 덩치가 나타났다. 한눈에 평범한 체격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서서히 거리가 가까워졌다. 가까워질수록 우람한 체격이 뚜렷해졌다.

‘운동선수구나…’라고 속으로 생각하는 순간 그가 수줍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큰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해맑은 웃음. 그때 나눈 대화는 뿌연 수증기처럼 기억이 아련하지만 그의 순수해 보이는 웃음은 또렷이 기억에 있다. 2001년 겨울이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사우나에서 그렇게 조진호(삼성)를 만났다.

 그는 우리가 기억에서 잊기 쉬운 ‘2등’이다. 야구팬이라면 누구나 첫 번째 메이저리거 박찬호를 잘 기억한다. 그러나 두 번째 한국인 메이저리거가 누구냐는 질문에 “1998년 펜웨이파크 마운드에 우뚝 섰던 조진호”라는 대답을 금방 하기는 쉽지 않다. 그를 기억하기 더 어려운 것은 그가 지난 4년간 야구팬의 시야에서 사라졌었기 때문일 것이다.

 2003년 국내 프로야구 SK로 돌아온 그는 그해 4승(5패)의 성적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기억하기 싫은 병역 비리에 연루됐다. 이후 8개월을 감옥에서 보냈고 26개월을 군대에서 보냈다. 그런 그의 행적을 잊지 않고 또렷이 기억하기란 결코 나오지 않는 시험문제,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보츠와나의 수도를 외우고 다니는 것과 같았다. ‘인사이드’의 기억에서도 그는 그때 그 사우나의 수증기처럼 사라졌었다.

 그의 이름을 다시 기억해 낸 건 그가 코끝이 찡한 감동적인 승리를 거두고 나서였다. 군 복무를 마치고 지난해 9월 테스트를 받고 삼성에 입단한 조진호는 그동안 2군에서 재기를 위해 노력했고, 4일 한화전 선발로 나서 당당히 승리투수가 됐다. 6이닝 4안타 무실점. 상대 타선이 강했기에 그의 승리는 더 빛났다. 2003년 8월 롯데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지 무려 4년8개월 만이었다. 중학교를 한 번 더 다니고,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 끝날 만한 그런 시간이 지난 이후에 맛보는 승리의 열매였다.

그날 조진호의 승리 소감은 7년 전 사우나에서의 그 웃음처럼 소박하고 수줍었다.

그는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설 때보다 더 떨렸다. 그동안 팬들의 함성이 그리웠다. 힘들었지만 포기라는 단어는 머릿속에 떠올리지도 않았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담담한 그의 소감이 더 진실하게 느껴졌다. 그가 겪은 힘든 재기의 과정이 그 짧은 말 속에 담겨 있었다.

 스포츠가 줄 수 있는 드라마틱한 감동 가운데 하나는 다시 일어서는 것. 재기다. 컴백이다. 누구나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그 과정은 처음 일어설 때보다 힘들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도전해 당당히 일어섰을 때 자신은 더 강해지며 보는 사람은 진한 감동을 느낀다. 나도 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는다. 조진호의 승리는 작은 1승이지만 분명 그의 덩치만큼 큰 희망의 메시지를 주었다. 올해 LA 다저스에서 21개월 만에 승리를 올린 박찬호의 도전도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이다.

또 활약의 무대는 다르지만 현재 2군에서 이를 악문 이승엽과 김선우. 한때 정상에 섰던 그들이다. 그들도 지금의 시련을 더 강해지는 과정으로 여기고 이겨내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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