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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못 짓는 소금밭 비싸게 사 30년 방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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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호 18면

70년대 우리나라 정부가 해외농장으로 사들인 리아타마우카 농지. 농사가 불가능한 황무지로 드러나 30년째 방치돼 있다. 중앙포토

1.준비 부족의 늪에 빠진 연해주 진출
연해주는 식량기지를 꿈꾸던 이들에게 ‘아쉬움의 땅’이다. 90년대 고합 그룹, 새마을운동중앙회, 농촌지도자중앙연합회 등 12개 단체·기업이 “연해주에 진출하겠다”며 경쟁적으로 진출을 시도했으나 대순진리회·동북아평화연대 등 일부를 빼고는 현지에서 철수했다. 최근 몇몇 대기업이 연해주 진출을 모색하고 있지만 투자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실정이다.

실패로 끝난 해외진출 사례 3건

황창영 새마을운동중앙회 국제협력팀장. 그는 97년부터 2001년까지 연해주 호롤군 농장에서 콩·메밀 등 재배를 지휘했다. 황 팀장은 “연해주를 너무 몰랐다”는 점을 가장 큰 실패 원인으로 꼽는다. “2년간 준비했지만 현지 농업 경험이 부족했어요. 예를 들어 한국산 농기계가 러시아 땅에 맞지 않아 고장 나기 일쑤였습니다. 기후·장비·인력…성공적인 재배를 위한 세 가지 요건이 모두 불리했지요.”

그는 “연해주는 춥고 비가 많이 오는 데다 사계절이 일정하지 않다”며 “현지인은 기후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보리·귀리·밀 등 7~8가지를 나눠 심는 ‘작물 포트폴리오’를 짜는데, 우리는 한두 가지만 심었다가 서리가 내려 모두 버린 적도 있다”고 말했다.

땅이 예상보다 기름지지 않아 수확량이 적은 데다 물이 빠지지 않아 재배 일정 자체가 지연되기도 했다. 황 팀장은 “한국에서는 50㎏의 쌀 종자를 심으면 방앗간에서 약 4t의 쌀을 얻을 수 있는데, 러시아에서는 250㎏을 심어도 900㎏~1.2t밖에 생산할 수 없었다”고 했다.

옛 소련 집단농장 시절까지만 해도 잘 갖춰져 있었던 창고·기계 등 기본적인 시설이 부족했다. 인프라를 갖출 자금도 모자랐다. 러시아 농지법 하나를 번역하려 해도 현지에 진출한 농민들이 돈을 걷어 번역사를 구해야 할 판이었다. 외환위기로 시름에 빠진 국민에게 희망을 주겠다는 취지로 시작했던 새마을운동중앙회의 연해주 농업사업은 결국 5년간의 시도 끝에 실패로 막을 내렸다. 황 팀장은 “한국 농민이 정착하지 않는 한 해외 진출은 성공할 수 없다”며 기본 여건 확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2.외환위기에 무너진 하얼빈 농장
김민철 한국농촌공사 인천물류센터 정화사업검증단장의 책상 서랍에는 ‘헤이룽장(黑龍江)성 삼강평원 농업개발 사업현황’이라는 제목의 보고서가 들어 있다. 이제 보고서 하나로 남은 ‘중국 식량기지’ 아이디어는 88년 여름 농업진흥공사(한국농촌공사의 전신) 사외이사였던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에게서 나왔다. 학술회의 참석을 위해 중국에 갔던 김 전 장관은 중국 농장에 관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중국이 개방하면 값싼 노동력과 넓은 땅을 이용해 해외 식량기지의 꿈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88년 12월 농업진흥공사는 중국 헤이룽장성 정부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그러나 당시 미수교국인 중국에 공기업이 대규모 투자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무산 위기에 놓인 중국 프로젝트를 살리기 위해 90년 1월 당시 장덕진 이사장 등 일부 임직원이 퇴직해 대륙종합개발(이하 대륙)을 설립했다. 장 이사장은 회장으로 취임했고, 해외사업처 조사과장이던 김 단장은 대륙종합개발의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대륙의 중국 진출은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다. 헤이룽장성 정부와 각각 31억1647만원씩 출자해 현지법인을 세웠다. 합자법인은 중국 하얼빈시 삼강평원 일대 3만8000㏊를 40년간 임대했다. 생산물의 50%는 한국으로 수입하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토지 임대료는 연간 1140만원(당시 환율 기준).

91년 대륙은 중국 국가계획위원회와 한국은행의 투자 승인을 얻었다. 대륙은 1차분으로 1만3200㏊를 개간해 3510㏊의 땅에서 한 해 콩 2975t, 밀 3225t 등 곡식 6582t을 생산했다. 작지만 의미 있는 성과였다. 대륙의 중국 개척에 제동이 걸린 것은 96년. 추가 투자를 위해 추진했던 2200만 달러 상당의 차입자금 조달 길이 막혔다. 96년 5월 현지 직원을 일단 철수시키고 개간한 땅을 현지 농민에게 임대하기로 했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97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중국으로의 복귀는 계속 미뤄졌다. 현재 대륙은 땅을 임대하는 위탁 영농을 계속하고 있다. 연 10억원의 임대 수입은 한·중 양측이 절반씩 나눠 갖고 있다.

중국 교두보 확보가 좌절된 지 12년. 김 단장은 ‘친정’인 한국농촌공사에 계약직 간부로 돌아왔지만 아직도 중국을 향한 꿈을 버리지는 않았다. 김씨는 “우리는 실패한 게 아니라 자금이 부족해 중단한 것”이라며 “아직은 실패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금도 중국에서 ‘함께 농사짓자’는 제의가 들어옵니다. 만약 실패라는 판단이 내려졌다면 헤이룽장성 정부에서 합작을 파기하지 않았을까요?”

3.30여 년 전 땅값 그대로 아르헨티나 농장
아르헨티나 리아타마우카. 한국의 해외 농업 사업 중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꼽히는 곳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서북쪽으로 986㎞ 떨어진 곳에 있는 리아타마우카 농지는 구입 당시부터 논란을 일으켰다. 정부가 2만894㏊의 농지를 ㏊당 100달러가 넘는 211만 달러에 구입하자 ‘사기를 당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됐다. 2003~2006년 아르헨티나 대사를 지낸 최양부 한국무역협회 연구자문위원은 “30년간 땅값이 올라서 현재 시세가 100달러”라며 “그 당시 땅을 매입한 과정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더구나 농사가 사실상 불가능한 땅이었다. 농지 구입 직후인 79년 1월부터 6개월간 농업진흥공사가 6.9㏊의 땅에 콩과 수수를 시험 재배했으나 실패했다. 96년 6월 정부 합동조사에 참가한 김석권 국립산림과학원 임업연구관은 “리아타마우카는 세계 사막화 진전지역에 속하는 기후적 특성을 나타내는 곳”이라며 “강물과 지하수·토양의 염분 농도가 높아지고 있어 식물로서는 소금물을 마시는 셈”이라고 말했다.

연평균 강수량은 560㎜로 부에노스아이레스 등 다른 지역의 절반 수준이다. 2003년 현지 조사에 참여한 휴고 폰 베르나드(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 교수는 “땅을 개간할 경우 염분이 지면으로 올라와 농장 전체가 소금 밭이 될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농지에 대한 자료가 축적되지 않은 점도 ‘계속되는 실패’를 부추기고 있다. 담당 기관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에는 리아타마우카 농지에 대한 어떠한 자료도 남아 있지 않다. KOICA 행정법무팀 직원들은 “95년 KOICA의 해외이주 지원 업무가 외교부로 이관되면서 담당 조직이 해체되고, 행정법무팀이 해외 농지 업무를 맡게 됐지만 우리에게도 자료가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기자가 ‘아르헨티나 리아타마우카 농장 현황(2004년 KOICA 발간)’을 제시했으나 KOICA 직원들은 “처음 보는 자료”라고 했다. 지난해 5월 정부는 리아타마우카 농지를 칠레 테노 농장과 함께 KOICA에서 한국농촌공사로 이관하기로 결정했으나 현재 기관 간 협상이 진행 중인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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