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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 선정위원회’가 고른 新고전<18>『조선 후기 농업사 연구 2』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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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호 23면

1970년대까지만 해도 봄 가뭄은 신문·방송의 주요한 기삿거리였다. 지금과 달리 농업 국가의 모습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봄 가뭄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논에 물이 없으면 벼를 심을 수 없어 한 해 농사를 망치기 때문이다. 모판에 기른 모를 논에 옮겨 심는 이앙법은 오랜 역사적 과정 속에서 정착된 농법이었다.

조선은 스스로 자본주의 싹을 틔웠다

세종 때 편찬된 『농사직설』은 “이앙법은 제초에는 편하지만 한 번 큰 가뭄을 만나면 실수하니 농가에 위험하다”고 적고 있다. 이앙법을 쓰면 모내기철에 가뭄을 만나 한 해 농사를 망칠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물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모를 심을 수 있도록 논에 직접 볍씨를 뿌리도록 권장하고 이앙법을 금지했다.

『조선 후기 농업사 연구 2』 김용섭, 1971, 지식산업사(증보판, 2007)

그러나 농민들은 정부의 금령을 어겨가며 이앙법을 썼다. 잡초 제거에 드는 노동력을 대폭 절감할 수 있는 데다 수확도 많고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금령에도 불구하고 이앙법이 확산되자 숙종 때는 관개시설이 구비된 농지에만 제한적으로 이앙법을 허용했다. 하지만 관개시설이 없는 논까지 이앙법은 계속 확산됐다. 정조 때는 이앙법을 허용하되 수리시설을 확충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논농사의 이앙법에 해당하는 것이 밭농사의 견종법이다. 조선 후기 농민들은 조나 보리 등의 밭 작물을 심을 때 밭이랑 대신 밭고랑에 심는 견종법을 선호했다. 김매기 등 노동력은 절감되는 반면 소출은 배가 되기 때문이었다.

『조선 후기 농업사 연구2』는 이앙법과 견종법 등 선진 농법이 등장해 노동력이 덜 필요하게 되고 생산성이 크게 늘면서 대규모 경작이 가능해졌고, 그 결과 커다란 사회변동이 생겼다는 것을 논증한 책이다. 조선 후기 사회 내부에 봉건적 생산양식을 해체하고 새로운 생산양식을 대두시키려는 내재적 발전의 모습이 있었다는 것이다.
양반층이 농사를 지을 때 조선 초기에는 노비 노동에 주로 의지했는데 후기에는 점차 머슴과 일반 농민을 고용하는 비중이 커졌다. 주인과 노비라는 봉건적 생산관계가 대가를 지불하고 노동력을 쓰는 상업적인 농업으로 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 농촌사회는 새 농법을 선도하면서 신분이 상승한 경영형 부농과 이를 쫓아가지 못하고 농지에서 배제된 소(小)빈농층으로 나뉜다. 빈농들은 삯을 받고 농사를 짓게 되었는데, 이들을 고용해 상업적으로 농업을 경영한 사람들이 바로 경영형 부농층이다.

저자는 이들을 토지에서 유리된 노동력을 흡수해 자본가적 생산을 하던 계층으로 본다. “그러한 점에서 이들은 봉건적인 생산양식을 타도, 해체하고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생산양식을 수립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계층에 가장 가까운 존재였다”(436쪽)는 것이다. 조선 사회 내부에서 봉건적 생산양식을 해체하고 새로운 생산양식으로 나아가는 발전 양상이 뚜렷했다고 보았다.

저자의 이러한 연구는 일제가 우리 민족을 영구히 지배하기 위해 만든 한국사의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극복하는 논리적 근거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무엇보다 일제 식민사학과 그 후예들의 전가의 보도였던 실증적 방법을 통해 이런 결론을 이끌어낸 점이 돋보인다.

그러나 아직 한국 학계는 이러한 내재적 발전이 왜 새로운 생산양식의 수립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했는지에 대한 후속 연구가 미흡하다.

경제 방면의 이런 발전을 가로막은 것이 조선 후기의 정치인지, 일제의 압도적 무력이었는지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있어야 내재적 발전론과 정체성론은 보다 수준 높은 단계의 논쟁으로 접어들 수 있을 것이다.



※신(新)고전=지난 반세기 동안 출간된 책 중 현대사회에 새로운 시대정신이나 문제의식을 제공한 명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산하 ‘좋은책 선정위원회’가 중앙SUNDAY 독자들에게 매주 한 권의 신(新)고전을 골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