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이런 꿈같은 미인이 아기를 낳지 않는다면 우리 여성계의 큰손실일 겁니다.』 침울한 기색에 윤과장은 농담하듯 아리영의 마음을 북돋우려 했다.
『천천히 결정하십시오.궁금하신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주시고요.』 따뜻한 배웅을 받고 진찰실을 나서자마자 남편이 서둘러물었다. 『어떨 것같소?』 『…자신이 없어요.』 『아이 낳을 자신 말이요? 당신은 아직 20대처럼 젊은데….』 30대 후반의 뒤늦은 초산(初産)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알았는지 아내의 젊음을 치켜올렸다.
사실 아리영은 스물대여섯 정도로 보였고,육신의 은밀한 곳도 어린 석류처럼 야무지고 연붉었다.
『잘 생각해봐요.대(代)는 이어야하지 않아?』 남편의 말이 으름장같이 들렸다.
아리영에게 끝내 아이가 없으면 차남인 아버지 가계(家系)는 제쳐놓더라도 무남독녀였던 어머니쪽 혈통은 완전히 끊어진다.
-양자를 하면 되지 않는가.자연스럽지 못한 방법으로 아이를 얻느니 이미 태어난 생명 중에서 골라 입양(入養)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일 것이다.
제주도 나선생의 쌍둥이 아들 계일.계원이 생각났다.어떻게들 지내고 있을까.쌍둥이 형제도 보고싶고 나선생도 보고싶었다.
인공수정으로 태어났다는 세쌍둥이,다섯쌍둥이 생각도 덩달아 났다.신비로웠다.
조각 조각으로 흩어지는 산란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보니 정길례 여사는 이미 돌아가고 없었다.
거실 탁자에 정여사가 가져왔다는 유밀과(油蜜菓) 곽이 놓여있고,홍차 세트가 가지런했다.아버지가 손수 차를 만들어 대접했을것이다.찻잔 두개의 그 가까운 간격에 마음이 쓰였다.런던 공관에 있을 때 어머니가 산 홍차용 일습이었다.
과민한 탓일까.두개의 홍차 잔 언저리엔 감미한 사랑의 분위기가 서려있었다.
『어머나,참 예쁜 보자기네요.』 유밀과 곽 옆에 초록색 항라(亢羅)를 잇댄 고운 조각보를 발견하고 아리영은 탄성을 올렸다. 『참,보자기 돌려드리는 걸 잊었군.내일 갖다 올려라.』 아버지는 힘이 없어보였다.
저녁 식사 준비를 한 다음 아버지를 부르러 2층 서재로 들어서서 숨을 들이켰다.어두운 방에 불도 켜지 않은채 소파에 멍하게 앉아있는 것이다.
저런 모습의 아버지를 보는 것은 몇해만인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까지도 아버지는 저런 자세로 저 소파에 기댄채 멍하게 밤을 새운 때가 많았다.
어머니가 즐겨 앉던 자리에 새삼 기대어 아버지는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어머니와의 결별(訣別) 의식(儀式)같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