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1년간 뒤쫓은 한국의 야생동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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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인간의 시간이다. 밤은 야생이 살아 움직이는 시간이다'.

EBS가 29일과 30일 밤 11시 이틀 연속 방영하는 2부작 자연 다큐멘터리 '공존의 그늘'은 이렇게 시작한다. 제작진은 "야생동물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 야생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인간과 아주 가까이, 단지 활동시간을 달리해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공존의 그늘'은 동물의 생태를 관찰하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인간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최근의 자연 다큐멘터리 경향을 그대로 보여준다. 어찌 보면 KBS가 이달 초 방영했던 '멸종'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멸종'이 이 땅에서 이미 사라진 동물을 통해 인간의 욕심이 부메랑처럼 인간에게 해가 되어 돌아온다는 메시지를 전한 반면 '공존의 그늘'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눈을 인간에서 동물 쪽으로 더 옮겼다.

1부 '사라져 가는 이야기'는 오대산 끝자락에 있는 강원도 강릉시 전곡면의 닭.오리 농장을 2003년 2월부터 올해 3월까지 1년여 동안 관찰하며 멸종위기에 놓인 육식동물 살쾡이와 담비 등 현재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야생동물을 화면에 담았다. 2부 '인간의 땅, 야생의 영역'은 강원도 정선 고랭지 배추밭에서 벌어지는 농민과 야생동물 간의 작은 전쟁을 담았다. 야생동물이 줄면서 거꾸로 고라니 같은 초식동물은 엄청나게 늘어났다. 그 결과 채소밭에는 대포를 쏘고 덫을 놓으면서까지 밭을 지키려는 인간과 이를 무릅쓰고 밭을 쑥밭으로 만드는 초식동물 간의 전쟁이 연일 벌어진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민가의 농장에 숨어들어 닭을 사냥하고, 고랭지 배추밭을 엉망으로 만드는 야생동물은 그저 쫓아내야 할 침입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자연의 또 다른 주인인 야생동물의 입장은 딴판이다. 농장을 공격해 닭의 목을 낚아채던 살기등등하던 살쾡이가 덫에 걸려 한쪽 다리를 잃은 뒤엔 농장에 숨어들어와 감히 닭은 넘보지도 못하고 겁에 질린 눈으로 조심스럽게 쥐 사냥에 나서는 모습은 인간의 잔인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자연 다큐멘터리 분야에서 EBS의 간판 PD인 박수용씨 아래서 조연출 생활을 하다 '공존의 그늘'을 제작한 서준 PD는 "아직은 이 땅에 있지만 없어질 것에 대한 기록"이라고 말했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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