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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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강의가 시작되기 전의 교실 안은 언제나 왁자지껄했다.
여자들은 왜 이토록 숨이 턱에 차리만큼 떠드는 것일까.그 열띤 자기표현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리영은 언제나 싸늘한 고립감을느꼈다. 미모 이상의 자기표현은 없다.
그래서 수다를 떨 필요가 없다기보다 원래 말수가 적어 조용한아리영을 둘레 여자들은 교만부리는 것 쯤으로 여겼다.변명할 성격의 일도 아니어서 그냥 넘겼으나 쓸쓸했다.
소음을 비집고 정여사가 나타났다.
타는 듯한 주홍색 슈트를 맵시있게 입고 있다.가무스레한 얼굴과 반짝이는 검은 눈이 그 주홍 불꽃 속에 돋보인다.
정길례(鄭吉禮).48세.유부녀.늦깎이 화가 지망생.터질 듯한의욕이 요기(妖氣)처럼 서려보이는 저 여인이 아버지의 마음을 낚은 임자다.
어머니 돌아가신 후 십년 넘도록 아버지가 혼자 살아온 것은 순정을 지켜서라기보다 마음 기울일 상대가 없었던 탓이다.그런데뒤늦게 생긴 상대가 유부녀라니….
정여사가 다가와 정중하고 리드미컬하게 말했다.
『미인도를 감상하게 언제 댁에 가뵐 시간을 허락해주십시오.』내장산으로부터 돌아오는 찻간에서 아버지는 이당(以堂)김은호(金殷鎬)의 『미인도(美人圖)』얘기를 했었다.그림의 여인이 어머니얼굴과 흡사하다하여 외할아버지가 애써 구한 작품.아버지 서재가있는 2층 복도에 걸어놓았다.
그 미인도를 보러 오겠다는 것이다.당장에라도 찾아올 듯한 적극성에 밀려 날을 잡았다.
강의가 파하자 아리영은 서여사와 정여사를 청하여 미술관 안의다방으로 갔다.송아지 이름 때문이었다.
『하얀 송아지가 태어났다구요? 그것 상서(祥瑞)네요.』 서여사가 자기 일처럼 좋아했다.
『소소….「흴 소(素)」의「소」와 「우(牛)」를 가리키는 「소」,이 두가지 「소」를 붙여서 「소소」라는 건 어때요? 좀 이상한가?』 송아지 사진을 들여다보며 서여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인헌화가에 나오는 「암소」는 한자로 「모우(母牛)」라표기돼 있지요.이 소리를 그대로 따서 「모우」라 하면 어떨까요? 「모은다」는 뜻일 수도 있고….』 『장차 목장 재산을 모으는 상서로운 흰 송아지 「모우」.그럴듯해요.좋은 이름인데요.』정여사의 아이디어에 서여사가 선뜻 동의했다.
밤 늦어서야 돌아온 아버지는 정여사가 이름지었다는 얘기에 몹시 신나는 듯 보였다.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이 밤중에 누가 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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