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느티나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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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감수성이 예민한 18세 여고생이 엄마와 재혼한 의부(義父)의대학생 아들을 남몰래 연모한다.
하지만 물리학도며 수재(秀才)인 오빠는 그같은 여동생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짐짓 딴청만 한다.소녀는 그런 오빠가 야속하기만 하고,그래서 마음이 아프면 늘 뒷동산엘 올라간다.
『들장미의 덤불과 젊은 나무들의 초록이 바람을 바로 맞는 등성이였다.바람을 맞으면서 앉아 있곤 하였다.젊은 느티나무의 그루 사이로 들장미의 엷은 훈향이 흩어지곤 하였다.터키즈 블루의원피스 자락 위에 흰 꽃잎을 뜯어서 올려 놓았다 .수없이 뜯어서 올려 놓았다.』 여류작가 강신재(康信哉)의 대표적 단편소설『젊은 느티나무』의 한 장면이다.이 대목을 읽으면 한 아름다운소녀와 느티나무가 서 있는 언덕의 풍경이 조화를 이루면서 아스라히 머리속에 그려진다.매우 낭만적이다.
하지만 느티나무에는 그런 낭만적인 이미지만 있는게 아니다.우리 전통사회에선 은행나무.팽나무와 함께 느티나무를「3대 신목(神木)」이라 불렀다.수천년.수백년을 사는 장수목(長壽木)인데다그 모습이 웅장하고 쓰임새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 다.
수관(水管)이 크고 사방으로 고루 퍼져 짙은 녹음을 만들며,병충해가 없고 가을엔 아름다운 단풍이 드는게 느티나무의 특징이다.그래서 옛날에는 마을마다 정자(亭子)나무로 가장 뛰어난 기능을 발휘했고,은행나무와 함께 천연기념물로 보호되 고 있는 대표적인 나무가 또한 느티나무인 것이다.물론 모두가 노거수(老巨樹)들이다.
쓰임새도 아주 다양하다.뒤틀림이 적은데다 무늬결이 뚜렷하고 아름다워 불상(佛像)조각이나 악기를 만드는데 즐겨 쓰이는가 하면 경목지(經木地:얇은 나무종이)로는 느티나무가 최고라는게 정설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친근감을 주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수백년동안 묵묵히 우리들의 삶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 웅장한 자태일것이다.인간보다 열배,스무배나 더 사는 느티나무들은 인간사회의이런저런 악다구니를 내려다보며 한심해 할는지도 모른다 .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강남구 도곡동의 7백살난 느티나무에 고사제(枯死劑)가 투입됐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주민들은 이곳에 아파트를 지으려는 건설업자의 짓으로 보는 모양인데 만약 사실이라면 한심한 일이다.「신목」의 징벌 이 두렵지도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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