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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만들 때 돼지털·한약재도 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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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돼 있는 태조실록.글씨를 쓴뒤 밀랍을 입혔다.

세계기록유산이자 국보 제151호인 조선왕조실록(완질 1188책)을 '해부'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전란 등 수차례의 위기 속에서도 600여년을 버텨 온 실록의 훼손을 막고 장기 보존책을 찾기 위해서다. 실록을 소장한 서울대 규장각은 물론 종이문화재 전문가인 박지선 용인대 교수, 화학자 이인성 서울대 교수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있다.

*** 장기보존 위해 '해부' 작업

연구팀은 문헌연구와 각종 실험을 통해 ▶실록이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으며 ▶어떻게 보관됐고 ▶왜 훼손되는지 세밀히 추적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도 속속 드러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종합연구가 기획된 것은 2년 전 국정감사를 통해 조선전기 실록 중 131책이 훼손됐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송기중 규장각 관장은 "우선 기초연구를 수행한 뒤 보존 방안을 마련하고 궁극적으로는 훼손된 부분도 복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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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어껍질.염소수염도 활용=조선시대 역대 실록편찬 사업은 단순한 서책 제작을 넘어선 국가적 대역사였다. 실록청이라는 임시관청을 중심으로 실록과 보관용 물품을 만드는 데에 100여명의 장인(匠人)들이 동원됐고 전국 각지에서 물자를 조달했다.

최근 규장각 연구팀이 실록의 편찬과정을 기록한 실록청의궤(實錄廳儀軌)를 분석한 결과 시대별로 편차는 있으나 수십여종의 다양한 재료들이 활용된 것으로 확인됐다.

인조실록의 경우 편찬.보관 과정에서 50여종의 재료가 이용됐다. 종이.먹.풀.천 등 기본적인 서책의 재료뿐 아니라 ▶상어껍질.돼지털.염소수염.말 갈기.사슴 가죽.개 꼬리털 등 동물성 재료 ▶송진.들기름.콩가루 등 식물성 재료 ▶한약재인 비상.천궁.창포▶ 주토.반주홍 등 염료 등이 포함돼 있다. 이 중 비상.천궁 가루 같은 재료는 실록 보관시 습기를 차단하고 좀이 스는 것을 막기 위해 사용한 일종의 방부제로, 돼지털은 책을 털어내는 데 쓰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병주 규장각 학예연구사는 "연구가 더 진전돼 각 재료들의 구체적인 쓰임새와 재료마다 기재된 도량형의 환산치를 알아내면 이를 그대로 재현해 '복제 실록'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훼손 원인은 밀랍?=현재 훼손된 실록은 밀랍을 입힌 태조~명종대 것이다. 이 때문에 그간 밀랍이 실록을 망가뜨렸을 것으로 추정돼 왔다. 세월이 흐르면서 밀랍이 딱딱하게 굳어지면서 책장에 균열이 생겼다는 것이다.

*** 훼손 원인 놓고 의견 분분

이인성 교수는 실록에 사용된 밀랍이 어떤 종류였는지 찾는 작업을 맡았다. 국내산은 물론 일본.중국.동남아 등의 밀랍과 실록에 입혀진 밀랍을 대조하고 있다. 실록은 당시에도 최고의 귀중본으로 국내산.수입산을 가리지 않고 가장 좋은 제품을 썼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는 "아직 결론을 내기 힘든 단계"라고 전제하고 "지금까지의 분석으로만 보면 실록에 사용된 밀랍은 국내산보다는 오히려 동남아산 등과 더 유사하다"고 말했다.

훼손 위험이 있는 데도 왜 굳이 밀랍을 입혔는지도 수수께끼다. 한편에서는 "밀랍이 훼손 원인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교수는 "최근 중국의 고궁박물관에 소장된 청대 서화를 관찰한 결과 밀랍지가 그냥 종이보다 보존상태가 좋았다"며 "여러 차례 옮기는 과정에서 책에 압력이 가해진 것이 훼손의 원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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