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의 역사] 27. 대비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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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 서울시청 앞에서 인민군에게 잡힌 시민들. 이들은 대부분 의용군으로 끌려갔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겁쟁이가 됐나. '고철 수집원' 신분증을 가졌으면서도 거리는 무서웠다. 알 수 없는 공포가 공기 속에 가득한 것 같다. 동창들 소식이 궁금해졌다. 먼저 한강다리 근처의 한영철을 찾아갔다. 윤억현과 결혼한 지 얼마 안 되는 옥남이가 나오더니 대뜸 "큰일났어요! 오빠도, 그이도 의용군에 끌려갔어요! 그렇게 지하운동을 열심히 했는데도요!"

그랬었나? 어쩐지 항상 긴장된 표정들이었다. 남로당원일거라는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대접을 못 받는가. 남로당 당수인 박헌영(朴憲永)도 그런 대접을 받았는가. 돈암동으로 가보았다. '1등 열차'를 타고 세상에 나온 김원식도 그들과 함께 놀았을 것이다.

"운사 잘 왔어. 문리대에 갔다오는 길이야. 아직 질서가 안 잡혀 그런지 사람을 제대로 몰라봐."

"한영철.윤억현이 의용군에 끌려갔다면서?"

"그게 좀 이상하게 됐어." 고개를 떨어뜨리면서 그는 말했다. "오래지 않아 감을 잡겠지. 제대로 대접해주겠지. 운사 모르게 우리는 지하운동을 열심히 했었거든."

"니가 무슨!" 나는 쏘아붙였다. "너는 놋그릇 아닌가. 나는 질그릇이다. 왜 내가 그쪽에 가담하지 않는지 아냐? 인간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은 나다."

"지금은 혁명 과정이야."

"얼마 동안 구경해보니 글렀다. 나는 사라질란다. 어디론가!"

삼각지로 가다가 한국은행 앞에서 구평회와 그의 동생 두회(斗會)를 만났다.

"무섭지 않나 이렇게 나돌아 다니게?"

"응, 저기 남대문시장에서 태회형이 비단장사를 하는 척하고 있다. 운사는 방송국 어찌 됐나?"

"의용군 끌려가다 도망쳐 나왔다. 어디 가서 숨을 작정이다."

"나도 고향에 내려갈까 하는데 무서워서 어디 갈 수가 있나."

나는 지나가다 구태회형이 비단가게에서 옷감 재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 씩 웃었다.

서울역을 지나 갈월동으로 가다가 문득 그 근처에 사는 여류시인이 생각났다. 들렀더니 반갑게 맞아주었다. 홍태조(洪泰祚). 방송국 문예계에서 나와 같이 일했었다. 적산가옥 2층이었다. 깔끔한 여자 혼자의 살림이다.

중앙대를 나왔다. 시를 잘 썼다. 한번 퇴근길에 명동에서 저녁을 먹고 남산으로 올라가 중턱에서 밤을 새운 적이 있다.

이화고녀 출신. 결혼한 적이 있는데 낭군이 먼저 저세상으로 갔다고 했다. 이따금 차 한잔이라도 나누던 여자. 그 여자의 방에 내가 온 것이다.

이날 나만 기다리고 사는 어머니에게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젊은 사람은 모두 의용군으로 끌고간단다. 동네 사람들이 니가 어디 다니느냐고 묻는다. 인민위원회라는 데서도 왔다 갔다. 어디 숨을 데 없니?"

"있으면 어머니 혼자 사실 수 있으세요?"

"어떡하니… 니가 우선 살고 볼 일 아니냐."

결심했다. 세계문학 몇 권과 원고지를 싸가지고 나는 홍태조 집으로 갔다.

한운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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