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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영과좌절반세기>下.한국안보리 진출의 대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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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박수길(朴銖吉)유엔대사는 요즘 고민에 싸여 있다.한국이 안보리 이사국(비상임)에 선임됨에 따라 앞으로 유엔외교를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가로 이 궁리 저 궁리다.
안보리에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보통일이 아니다.91년 유엔가입만 해도 큰일이었는데,불과 4년만에 유엔외교의 핵심권에 진입하게 된것이다.유엔에서의 지위가 크게 올라가는 것은 물론 한국외교 전체로도 경사다.
朴대사는 얼마 전 멕시코대사가 해 준 말을 곱씹고 있다.
『안보리 이사국이 된다고 너무 좋아하지 마시오.안보리에 들어가면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걸로 기대하지만,맘대로 안돼요.입장만 난처해질뿐 결국 힘 센 나라가 하자는 대로 따라 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곧 깨달을 겁니다.』 이미 안보리 이사국을 한번 해본 나라 대사의 충고였다.사실 안보리 안에서도 상임이사국과 비상임이사국의 차이는 엄연하다.2년동안 강대국의 들러리만서다 나오는 경우가 보통이다.
일단 안보리 이사국이 되면 세계문제에 대해 한국 나름대로「입장」이 있어야 한다.여태까지는 보스니아 사태가 어떻게 진전되든,아프리카 르완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한국과 직접 관련이 없는 사안에 대해서는 모른척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 다.
그러나 이젠 사정이 달라졌다.
유엔에서 제기되는 모든 중요사안에 대해 일일이 한국의 입장을정리하고 표명해야 한다.사하라사막이나 티베트 산중에서 벌어지는일까지도 그저 구경만 할 수 없게 돼 버렸다.
「북한」이라는 단어가 나와야 비로소 긴장하던 종래의 외교패턴으로는 턱도 없다.
한국외교의 지평이 하루아침에 지구적 관심사로 확대되는 것이다.때문에 비록 힘은 들지만 한국외교의 이같은 「강제적 국제화」효과를 기대해 볼만도 하다.
유엔내에서 한국의 입지가 올라가는 건 좋지만 그에 따른 부담도 간단치않다.
당장 재정 부담 압력이 가중될 것이다.0.8%를 내고 있는 정규예산 분담금은 제쳐두더라도,평화유지활동(PKO)예산의 경우지금의 5배로 불어날 공산이 크다 .
현재 C그룹으로 4백만달러를 내고 있는데, 2천만달러를 내야하는 B그룹으로 옮기는 것이 불가피하다.지금까지는 C그룹에 머무르겠다고 사양해 왔지만 안보리 이사국까지 된 마당에는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렵다.이와 함께 대미(對美)외교가 의외의 고민에봉착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안보리에 들어가기 전까진 모호한 입장을 취하면 그만이었으나 이젠 다르다.
표결때마다 독자적인 입장을 밝혀야 하므로 매사를 주도할 미국과의 충돌도 일어날 수 있다.
벌써부터 개도국 비동맹국가들은 안보리진출을 앞둔 한국에 여러가지 도움을 요청해 오고 있다.리비아나 이라크 대사도 한국대사한테 부쩍 친절해졌다.
자기네를 도와달라는 것이다.그것은 안보리 안에서 미국 정책을반대해 달라는 것과 상통한 다.여간 난처한 일이 아니다 유엔 활동 자체에 대한 한국의 참여요구도 한층 거세질게 뻔하다.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사무총장은 경제통계까지 인용하면서 한국의 적극적 유엔활동 참여를 기회있을 때마다 요구해 왔다.평화유지군 파병을 비롯해 각종 인적.물적지원 부담 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다른 나라 외교관들도 한국이 일단 안보리에 들어가면 아프리카나라들처럼 단순한 거수기 노릇에 머무를 것으로 보진 않는다.
비록 비상임이사국이었지만 과거 일본이 그랬듯이 제법 중요한 역할을 해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또 남북한 문제 에 있어 안보리 이사국이라는 자리는 별다른 의미를 지닌다.
가뜩이나 유엔내에서 소외당하고 있는 북한으로선 여간 못마땅한일이 아니다.
이처럼 한국과 유엔의 관계는 종래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전개되도록 돼 있다.창립 50주년을 맞아 사방에서 유엔개혁론이 제기되고 있지만, 한국은 그 자신 「발등의 불」때문에 그런 시비에 본격적으로 끼어들 처지가 못된다.유엔의 구조 개혁이 어떤방향으로 진전되든간에, 한국의 유엔내에서의 활동범위가 질적.양적으로 급속히 확대돼 나갈 것이다.
朴대사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좌표를 규정하는 결정적 시기에처해 있습니다.미국과의 유대나 비동맹국과의 원만한 관계설정등 많은 제약요건들이 있으나 궁극적으로 국익에 맞도록 유엔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고 말한다.
유엔으로부터 지원이나 받던 과거에서 벗어나 한국도 이제 유엔을 국제외교의 장(場)으로 본격 활용해야할 때가 된 것이다.
[유엔본부=李璋圭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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