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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최교수에 관한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어쩌다 그렇게 됐다」거니,「잘못했다」거니 변명과 사과 비슷한 말마디조차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하기야 무슨 말을 하겠는가.변명이고 사과고 무슨 낯으로 하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뭔가 미심쩍었다.
남편은 혹시 최교수와의 관계를 아리영이 모르고 있다고 여기는것은 아닐까.최교수 조수 노릇을 너무나 자상하게 했다해서 투기부린 것 쯤으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새삼 가슴이 떨렸다.
산장 곳간에서의 두 육신의 몸부림과 울부짖음에 가까운 신음소리가 떨리는 가슴을 뒤덮었다.
그 스스럼없는 얼림.
만난지 하루도 채 못되어 어찌 그리 쉽게,어찌 그리 뜨겁고 진하게 얼릴 수 있단 말인가.곳간 삿자리를 온통 헤집으며 그들은 뒹굴고 있었다.
그처럼 격렬히 불타는 남편을 아리영은 겪은 적이 없다.충격이었다.그것은 죽고 싶도록 처절한 수모감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튿날 최교수는 죽었다.사고사(事故死)이긴 해도 깊은죄책감에 빠져야 마땅하다.남편은 묵묵히 일만 했다.이렇다 저렇다 말 한마디 없었다.그런 남편에게 질식할 것같아 아리영은 제주도로 달아났었다.
『이래도 함께 부부로 살아가야 하는지….』 당장 이혼하고 싶었지만 가산(家産)을 맡아 꾸리고 있는 「데릴사위」 같은 남편과 헤어지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무남독녀의 부담감을 또 한번곱씹었다.
남편의 편지는 한동안 갈앉아 있던 회의(懷疑)의 앙금을 다시의식의 수면 위에 떠오르게 했다.속이 부글거렸다.
정읍 나들이는 심한 우울증에서 조금 건져주는 구실을 했다.
애써 화려하게 차려 입었다.
반짝이는 앵두빛 점퍼와 몸에 딱 붙는 연분홍 팬츠.유행중인 스키웨어풍의 차림새다.진 앵두빛 굵은 테의 선글라스까지 썼다.
아리영은 선글라스를 잘 쓰지 않는 편이다.안경 알 너머 풍경빛이 변색해 보이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선글라스를 굳이 꺼내쓴 것은 자기를 과시하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뭔가 가리고 싶은 것이 있는 모양이라 스스로 어림짐작했다.
일행은 다섯이었다.아버지와 아리영,정길례여사와 서을희여사,그리고 서여사의 둘째 아들 김사장.
첫 인상이 좋았다.성실하고 청결해보였다.어머니 서여사의 신임이 두터운 것을 보니 경영 수완도 상당한 듯했다.
자료 준비를 착실히 해온 김사장 덕에 취재는 순조로웠다.
돌아오는 길에 내장산에 들러 산채비빔밥과 정읍특주로 저녁 식사를 들었다.
『운전을 안하시는 숙녀분들은 맘놓고 약주를 드십시오.』 정여사 잔에 술을 따르며 아버지가 흥겹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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