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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길 떠나는 시 ⑪ 『여왕코끼리의 힘』(조명, 민음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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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떠나온 곳으로 가야만 한다”

헐렁한 가방 메고 교보문고 가는 길
초겨울 바람 속 광화문 거리
소음과 스모그가 뒤엉켜 구르는 곳
경복궁, 종합청사, 노점상들 그리고 서점들
그 이름과 꿈 들을 부정하는 거대한 폐허
바람에 허물어지지 않는 것은 없었다
먼 석양의 뒤편에서 무너져 내리는 빌딩들
후미가 뭉개진 채 달리는 자동차들
위대함 저속함 우스꽝스러움 들이
끝 모를 잿빛 속으로 실려 갔다
마른 이끼 뒤덮인 승강기를 타고 하강하며
그 밑에 웅크린 수백만 권의 침묵이
폐허의 중심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뒷덜미가 반쯤 유실된 사람들 어슬렁거리는 지하 서점
한 노파가 두툼한 종이책을 넘기고 있었다
은가락지 속의 앙상한 약지
바람과 햇빛에 깎여 사라지는 것들을
떠나왔던 처음의 침묵에게로 다 보내 줘야지
등허리가 자꾸 허전하다, 이런!
-<바람의 페이지> 전문

서울시가 발표한 광화문 광장 조감도

시의 화자는 교보문고를 찾아가는 길이다. 그런데 그 길이 영 개운치 않다. 왜 그럴까? 가령 시의 시점이 “초겨울”이고 “바람” 부는 날이어서 그런 것일까? 그러나 “헐렁한 가방 메고”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가벼운 마음으로 가는 길이어서 초겨울 바람이 환기시키는 길의 괴로움을 상쇄시켜 주고 있다. 그렇다면 교보문고 가는 길이 순탄치 않은 까닭은 다른 데 있는 셈이다.
다 잘고 있듯이 교보문고는 “지하 서점”이다. 시인의 표현에 따르면 “마른 이끼 뒤덮인 승강기를 타고 하강”해야 도달할 수 있는 곳에 서점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이 서점에 가는 길을 우선 시간과 공간의 순서를 따라 서술한다. 지하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지상을 거쳐야만 하는 것이다. 지상이 없으면 위와 아래가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인 셈이다. 그런데 이 지상 자체가 수상하다. 보자.
교보문고 가는 길에는 “경복궁, 종합 청사, 노점상들 그리고 서점들”이 있다. 예상컨대 시인은 안국동 방면에서 혹은 독립문 방면에서 교보문고를 향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시청이나 종로, 혹은 서대문 쪽 방면이라면 위에 언급된 지명들은 교보문고 쪽이라기에는 다소간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물론 시인의 관념 속에서 그 지명들은 교보문고가 자리하고 있는 공간 속에 같이 더불어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인이 교보문고를 관념 속의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또 다른 ‘증거’ 혹은 ‘심증’은, 안국동 방면 혹은 독립문 방면에서 교보문고로 간다고 했을 때, 그곳에 과연 “서점들”이라고 복수로 말할 수 있을 만큼 서점들이 있을까라는 실제적 의문에 비추어볼 때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곧 시인은 교보문고라는 실제적 공간에 자신의 관념들을 덧붙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른 식으로 말한다면, 시인에게 교보문고 가는 길은 현실의 길과 더불어 관념의 길을 걷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시인은 현실과 관념이 겹쳐진 그 길에서 “거대한 폐허”를 본다. 아니 아예 “거대한 폐허”라고 단정한다. “경복궁, 종합 청사, 노점상들 그리고 서점들” 그 각각의 명사들을 생각해보라. “경복궁”으로 상징되는 인간의 역사, “종합 청사”로 상징되는 인간의 사회적 활동, “노점상”으로 상징되는 현실의 곤란함, “서점”으로 상징되는 인간의 꿈! 그것들 모두, “그 이름과 꿈 들을 부정하는 거대한 폐허”가 길 위로 전개되고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시인의 그 같은 인식은 비극적이지만, 도시의 황폐한 삶에 대한 비극적 인식이라는 사뭇 친숙하고도 보편적인 인식이기도 하다. 가령 “빌딩들” “자동차들” “끝 모른 잿빛” 등으로 이어지는 친숙한 이미지와 표현들이 그에 대한 하나의 반증이기도 하다. “거대한 폐허”와 관련해 정작 놀라운 것은 그 폐허의 중심으로 시인이 서점을 지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밑에 웅크린 수백만 권의 침묵이 / 폐허의 중심은 아닐까”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시인은 지상에서 거대한 폐허를 보고 그 시선을 땅 밑으로 하강시킨다. 그 땅 밑에는 ‘거대한 서점’이 있다. 그 서점에는 “수백만 권”의 책이 있고, 그 책들은 “침묵”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폐허의 중심”과 “수백만 권의 침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사실 이 질문이야말로 시 <바람의 페이지>를 읽는 핵심이다.
시인은 지상에서 이렇게 발언한다. “바람에 허물어지지 않는 것은 없었다.”라고. 그런데 허물어지는 것은 다 “뒤편”부터 허물어진다. “먼 석양의 뒤편에서 무너져 내리는 빌딩들” “후미가 뭉개진 채 달리는 자동차들”을 보라. 그리고 “뒷덜미가 반쯤 유실된 사람들” 또한 보라. 그뿐인가. 시인 역시 “등허리가 자꾸 허전하다”고 말한다. “바람”은 사물의 정면부터 허물지 않고 사물의 배후부터 허물기 시작하는 그 어떤 움직임이다. 뒤쪽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허물어지는 사물이 자신이 허물어지고 있음을 미처 제대로 인식하고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자신을 허물어버리는 그 힘은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의 힘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바람에 허물어지지 않는 것은 없다.” 그래서 또한 “바람”은 특정한 시공간의 힘이 아니라 영속적인 힘이어야 마땅하다. 그렇게 바람은 모든 것을 허무는 힘인 것이다.
그 힘 앞에 책들, 인간적인 가장 인간적인 사물이라고 할 수 있는 책들 또한 침묵할 수밖에 없다. 책들도 바람의 힘 혹은 바람의 길 앞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인 셈이다. 왜냐하면 책은 인간의 지식과 노력, 역사와 꿈을 시공간을 실어 넘기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바람을 이길 수가 없다고 시인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생각이야말로, 우리들로서는, 진정으로 비극적이다. 우리가 바람을 이길 수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시간과 공간의 유전(遺傳)에 대한 가장 고전적인 수단인 책에 대한 생각을 시인은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라지는 것들은 당연히 다 사라져야만 한다는 생각 자체를 비극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되 사라지지 않으려면,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 자체를 애써 부정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나아가 본다면, 지상의 폐허의 중심을 서점에서 찾는 시인의 시선은 시간과 공간의 유전에 대한 인간적인 모든 행위들에 대한 환멸을 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에서 인간으로 유전된 온갖 지식은 결국 황폐한 폐허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종의 문명에 대한 고발과도 유사하다. 우리가 아무리 앞으로 나아간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것은 폐허를 만들며 스스로 폐허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일 뿐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거처는 “떠나왔던 처음의 침묵”밖에는 없다. 발레리의 싯구, “바람이 분다. 살도록 애써야 한다.”는 시인에게 수용되지 않는다.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바람이 분다. 떠나온 곳으로 가야만 한다.”라고. 그렇게 바람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만의 책을 만든다. 우리는 그 바람이 걷어 넘기는 어느 페이지에 찍힌 한 점 혹은 도트dot일 뿐이다. 슬픈가? 바람의 길이? 아니면 인간의 길이? 나로서는 잘 알 수 없다. 적어도, 서점으로 가는 길이 늘 행복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을 뿐이다. 광화문과 서점으로의 산책을 나는 사랑하지만 광화문과 서점의 생리(生理)마저도 내가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호시탐탐 허물 기회를 노리고 있는 바람은 나의 어떤 면을 약한 고리로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을 안다면 ‘바람의 페이지’에서 도트가 아니라 느낌표나 물음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서점을 나와 광화문 거리에서 그렇게 나는 서성인다.

글_ 북리뷰어 김용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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