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최우석 칼럼

파격적 발상과 미흡한 준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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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요즘 놀라운 발표를 접할 때마다 옛날 일을 생각하고 애써 걱정을 접는다. 옛날에도 파격적 발상이 많았지만 어떻게 잘 마무리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3공(共) 시절 고속도로를 놓는다고 처음 발표했을 때 과연 그것이 될까 하는 걱정이 많았다. 포항제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고속도로는 개통되고 포철은 성공했다.

5공 들어 물가를 한 자리 숫자로 잡겠다고 했을 때 모두들 걱정했다. 그땐 물가가 10% 선으로 내려오는 것조차 쉽지 않아 보였다. 전문가들은 군인들이 경제에 대해 무지하니 저렇게 용감하다고 수군댔다. 상당히 무리를 하고 후유증이 있었지만 물가는 한 자리로 잡혔다.

이런 경제적 기적을 몇 번 경험하다 보니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은 좋은데 그것이 지나쳐 자신 과잉으로 가버린 것 같다. 결과만 보았지 그 과정에서 얼마나 노심초사하고 죽을 고생을 했는지는 잊어버린 것이다.

파격적 발상이 성공하려면 치밀한 준비와 비상한 노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호랑이를 그리려다 고양이를 그리기 쉽다. 고속도로를 만들 때도 구상 발표와 더불어 온 나라가 그것에 달라붙었다. 대통령부터 헬리콥터를 타고다니며 노선을 답사하고 공사 강행에 따른 여러 문제점을 직접 해결했다.

포철을 지을 땐 대통령이 최고경영자(CEO), 부총리가 기획담당 부사장 역할을 겸하다시피 했다. 무서운 서슬과 힘찬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물가를 한 자리 숫자로 잡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부는 군사작전 하듯 안정화 정책을 밀어붙여 예산.금리.배당.임금을 한꺼번에 묶었다.

군사독재 시대니 그런 무리가 통했는지 모른다. 선거를 앞두고 예산을 줄이고 추곡수매가를 동결하니 여당과 정권 주변에서 아우성을 쳤다. 성역이던 국방비까지 손대자 군 장성들이 항의차 예산당국에 몰려와 만약 북쪽에서 쳐 내려오면 전선으로 가기 전에 예산당국부터 손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성역 없는 예산 삭감을 적극 뒷받침했고 항의 장성들은 인사조처를 당했다. 안정화 정책은 힘을 받아 결국 한 자리 물가는 달성됐다. 오늘날의 물가 안정은 그때 기틀이 잡힌 것이다.

어려운 일을 하려면 그쪽으로 자원을 모으고 전력투구해야 한다. 무엇보다 위에서 일관성 있게 직접 챙기고 뒷받침해야 하는 것이다.

소위 민주화되고 나서 큰 성취가 드물다. 물론 옛날과는 달리 민주적으로 일을 해야 하는 점도 있지만 너무 많은 일을 인기를 얻어 가며 하려고 하는 데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또 옛날에 비해 일 잘하는 사람보다 말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졌다. 이들은 발을 땅에 두지 않고 의욕과 꿈에 두기 때문에 현실적 실현성을 덜 생각한다.

문민정부에서 금융실명제나 세계화란 파격적 구상을 내놓았지만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은 파격적 발상에 버금하는 치밀한 준비와 비상한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국민의 정부에서 벤처 붐을 일으킬 때, 또 신용카드 장려책을 쓸 때도 의욕만큼 준비가 없었다. 결국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도 고생하고 있다.

참여정부 들어서도 스케일 큰 구상이 많이 나왔다. 동북아 중심 국가, 행정수도 이전, 최근엔 자주외교, 자주국방에 동북아 균형자 역할 등 파격적 발상을 내놓았다. 고속도로와 포철 건설이나 한 자리 물가 목표를 능가할 정도의 파격적 발상이다. 그야말로 국가의 명운이 걸려 있는 어려운 일들이다.

그러나 얼마나 준비가 돼 있는지 아직 확신이 안 선다. 비상한 각오가 있는 것은 분명한데 그에 상응하는 치밀한 전략이나 실행 계획은 나오지 않고 있다. 우선 국민을 설득하는 노력도 부족하고 분위기 조성도 미흡한 것 같다. 민주적으로 일을 추진하기 때문이라고 하나 거창한 말만큼 일이 못 따라가고 있다. 과연 이 정도의 전략이나 박력, 준비로 잘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떨쳐 버릴 수 없다.

과거의 경험 때문에 웬만한 일엔 놀라지 않기로 했고 어떻게 되겠지 하고 생각하지만 요즘 일련의 사태에 대해선 옛날 식의 걱정을 떨쳐 버릴 수 없다. 거기에 치명적인 안보 문제까지 겹쳐 더욱 그렇다.

최우석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