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승만과대한민국탄생>25.끝 건국대업의 성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이승만(李承晩)박사는 광복 두달만인 1945년10월16일 몽매에도 잊지못한 조국에 돌아왔다.이 때 그의 나이는 만70세.
역사의 신(神)은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백발의 정치가에게 회심의 꿈을 실현할 마지막 찬스를 허여했다.천재일 우(千載一遇)의 이 기회를 놓칠세라 李박사는 혼신의 힘을 기울인 끝에 3년후 드디어 대한민국 건국의 대업을 성취했다.李박사의 꿈은 어떤 것이었으며,그는 이 꿈을 어떻게 실현했는가.
33년만에 고국에 돌아온 이승만은 이 땅에 개인의 자유.평등이 최대한 보장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는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그는 과거 1천여년간 중국식 군주제(君主制)전통을 이어온 이 나라에 미국식 민주공화제 정부를 수립 하려 했다.한때 기독교 전도와 교육사업에 전념했던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한국을 모범적 기독교 국가로 만들려는 미련이 남아 있었다.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평등사상에는 공명했다.그러나 그는 공산주의자들이 민족보다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나머지 조국을 소련의 속국으로 만드는 작업에 종사한다고 판단,그들을 적대시했다.좌우합작은 이론상 그럴듯 하지만-동유럽과 중국의 선례 에서 증명되었듯이-필경 공산당에만 이로울 뿐이라고 믿고 이 노선을 따르는 이상주의자들을 경원했다.한마디로 이승만은 민족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벗어난 다른 어떤 정치노선과도 타협하기를 거부했다.
즉각 독립을 추구하는 이승만의 앞길에는 넘어야할 장애물이 많았다.그는 한반도를 5년간 신탁통치하기로 작정한 美.蘇.英 등강대국의 협정을 무효화시켜야만 했다.그는 또 좌우합작을 통해 연립정부를 세우려는 미군정(美軍政)의 하지 중장 과 여운형(呂運亨).김규식(金奎植)등「중간파」의 계획을 좌절시켜야만 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38선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과 연계,남한의 공산화를 서두르던 박헌영(朴憲永)등의 남로당(南勞黨)과 승부를 겨뤄야만 했다.
서울에 도착한 이승만에게 초미지급(焦眉之急)은 국내에 정치기반을 구축하는 일이었다.먼저 그는 자기의 입장을 밀어줄 범국민적 운동본부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를 발족시켰다.다음으로 그는 미군정 자문기관인 「남조선대 한민국대표민주의원(民主議院)」의 의장직을 맡으면서 정권인수 준비를 했다.
이 무렵 그는 김성수(金性洙)로 대표되는 국내 보수세력의 도움을 받으면서 11월23일 환국한 김구(金九)등 임정세력과 제휴했다.그는 만만치 않은 공산당세력과 대 결하기 위해 전국학련.
서북청년회.대한노총 등 각종 우익단체들을 포섭,동원했다.
이승만은 해방전부터 소련의 대한(對韓)야욕에 경종을 울려왔다.1946년 봄 美蘇공동위원회(제1차)가 유산되자 그는 美蘇 합의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이 전연 불가능하다고 단정,6월초부터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을 제창했다.자신의 주장 을 美정부에 관철시키기 위해 그는 1946년 12월 미국으로 건너갔다.그가워싱턴에 5개월간 머무르는 동안 천우신조(天佑神助)일까 美정부의 대한 정책은 그의 반공노선과 부합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었다.냉전을 의식한 美정부는 194 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을 발포하면서 대소(對蘇)봉쇄정책을 표방했던 것이다.이 정책변화에 뒤따라 이승만은 드디어 美정부가 선호하는 한국지도자로 각광받게 되었다.
이승만과 미국은 신생 공화국을 출범시킴에 있어 유엔의 권위를이용하기로 했다.1947년 9월 미국이 신탁통치안을 포기하고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하자 이승만은 임병직(林炳稷)과 임영신(任永信)을 유엔에 급파,로비 활동을 전개시켰다.
미국대표와 이들의 노력이 주효하여 1947년 11월4일 유엔총회는「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독립국가를 세우자는 미국의 결의안을 43-0으로 가결시켰다.그후1948년2월 유엔「소총회」는 「유엔한국임시위원 단」의 접근가능 지역(즉 남한)만에서의 총선거 실시안을 가결했다.이로써 유엔은 이승만이 주창한 남한 단정수립안을 승인한 셈이다.
새나라 건설을 위한 총선거가 1948년 5월10일 실시되었다.서울 동대문구에서 출마,무투표로 당선된 이승만은 5월31일 개원된 제헌국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었다.국회의장 이승만은 헌법제정작업 총책임을 맡았다.국회는 이승만의 주장을 수용해 7월17일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채택,공포했다.이승만은 7월20일 국회에서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李대통령은 해방 3주년을 맞는 1948년 8월15일을 택해 대한민국탄생을 세계만방에 선포했다.
이승만은 필생 염원했던 독립국가 수립의 꿈을 아쉽게도 한반도남쪽에서만 실현했다.그렇지만 그는 지난(至難)한 건국과업을 촌철(寸鐵)도 없이 필설(筆舌)의 힘만으로 성취함으로써 희세(稀世)의 위재(偉材)를 과시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