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권투선수의 죽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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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띠를 둘러주고 훌륭한 쇠가죽 장갑을 끼워주며 두 사람을 격려하고 행운을 빌었다.두 챔피언이 링안에 들어와서 서로 손을 뻗는다.서로를 치고 받는 권투가 시작되자 이를 가는 소리도 들리고 온몸에선 땀이 비오듯 한다.유리알루스가 방심한 틈을 타 에퓨스가 턱을 강타하니 유리알루스의 몸이 껑충 튀어올랐다가 쓰러진다.마치 큰 고기가 얕은 물에서 뛰어나와 해초에 떨어졌다가다시 물속으로 곤두박질하는 모습이다.』 서사시(敍事詩)의 바이블이랄 수 있는 기원전 8세기 그리스 최대시인 호머의 『일리아드』에 나오는 권투장면이다.이로 미뤄 권투경기의 역사를 대충 짐작할 수 있지만 실제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오래다.기원전 4천년께의 이집트 상형문자에 선 왕의 군대가 무술훈련의 하나로 권투를 익혔다는 사실이 판독(判讀)됐고,크레타섬에서 발굴된 기원전 3천년께의 항아리엔 권투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중요한 것은 권투의 역사가 오래됐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죽기 살기의 싸움」이었다는데 있다.5세기께 西로마제국의 멸망과함께 이 야만적이고 비인도적인 경기가 자취를 감추기까지 권투는힘세고 돈많은 자들이 피를 보고 즐기는 오락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경기에 나서는 사람들은 모두가 노예나 전쟁포로들이었고,이들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상대방을 죽게 하거나 일평생 불구가 되도록 때려눕히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현대권투는 선수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에서 여러 체급으로 나누고까다로운 룰을 마련해 놓고 있지만 권투경기 도중 선수들이 사망하는 예는 좀처럼 줄어들줄 모른다.20세기에 들어선 이후 경기중 「링 사고」로 목숨을 잃은 선수는 5백명이 훨씬 넘고,후유증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선수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선수 안전에 관한 획기적인 조치가 마련되지 않는한 권투는 21세기의 개막과 함께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나오기도 했고,현대복싱의 발상지인 영국과 미국의 의학협회는 전세계에 권투경기 금지를 호소하기도 했지만 아직도 권투 경기장의흥분과 열기는 대단하다.
82년 김득구(金得九)가 미국에서 목숨을 잃은데 뒤이어 이번에는 일본에서 활약중인 이동춘(李東春)이 경기 직후 숨을 거뒀다.과연 「인간의 파괴 본능」을 충족시킬만한 스포츠는 권투밖엔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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