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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부대 1호 전병일씨 귀향 꿈 돕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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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전병일씨가 26일 자택을 방문한 외인부대원 모임 대표와 얘기하고 있다.

한국인 프랑스 외인부대원 1호인 ‘파리의 무국적자’ 전병일(79)씨의 귀향 꿈을 돕기 위해 한국의 전직 외교관 모임과 한국인 프랑스 외인부대원 출신 동료들이 나섰다.

함경도 출신인 전씨는 한국전쟁 당시 월남했다가 프랑스 대대에 배속돼 전쟁을 치렀다. 휴전 후 고향으로 갈 수 없게 되자 프랑스 군을 따라 베트남·알제리·프랑스 등을 50여 년간 떠돌았다. 그러다 우여곡절 끝에 국적 없이 홀로 파리 근교에서 쓸쓸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고향에서 눈을 감고 싶지만 국적이 없어 한국에 돌아갈 수 없다”는 그의 애틋한 사연이 본지에 보도되자 여기저기서 돕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다. 전직 주프랑스 외교관 모임은 전씨 귀국 돕기 운동을 추진 중이라고 본지에 전해 왔다. 전씨와 같은 한국인 프랑스 외인부대원 모임도 조만간 한국 정부에 전씨의 귀국을 도와 달라는 편지를 보내기로 했다. 외인부대 출신 한국인은 약 100여 명이다. 이 가운데 30여 명이 파리에 살고 있다. 이들은 프랑스의 한국전 참전 용사회, 프랑스 재향군인회 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프랑스 재향군인회에도 전씨를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고 밝혔다.

26일에는 익명을 요구한 한국인 외인부대원 모임 대표가 전씨가 사는 집을 찾았다. 대표가 먼저 한국전쟁 당시 참전했던 프랑스 장교들의 이름을 거명하자 전씨는 손뼉을 치며 반가워했다. 전씨는 한국전 당시 함께 근무했던 대대장과 중대장 이름 등을 줄줄이 댔다. 대표는 전씨보다 40여 년 늦은 1990년대에 외인부대에 입대했지만 한인 모임을 이끌어왔기 때문에 한국전 참전 프랑스 용사들을 자주 만나왔다. 덕분에 전씨와 말이 통했다.

대표가 “양구 931고지 전투 기억하느냐”하고 물었더니 전씨는 이내 흥분된 표정을 지었다. 931고지는 프랑스 대대가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전씨는 “어떻게 크레브 쾨르(CREVE COEUR·단장의 능선) 전투를 잊을 수 있겠느냐”며 “당시 2중대장이었던 구피 대위가 북한군 폭격에 맞아 사망했다”고 말했다.

이곳은 한국전쟁 최대 격전지 가운데 하나로 유엔군만 3700여 명이 죽거나 다친 곳이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프랑스인 참전 용사 모리스 나바르의 유골이 그의 유언에 따라 이곳에 뿌려졌다. 한 시간 넘도록 전씨와 대화를 한 대표는 전씨에게 “다음에는 선생을 만나고 싶어하는 한국전 참전 프랑스 용사를 모시고 오겠다”고 말했다. 전씨는 “언제든지 좋다”며 더없이 반갑다는 표정을 지었다.

◇20년 전부터 귀국 꿈꿔=전씨가 60년대부터 파리에 체류하면서 알게 된 몇몇 한국 교민이 “전씨가 늘 쓸쓸해하며 한국에 가고 싶어했다”고 전했다. 한 교민은 “20년 전쯤 전씨가 찾아와 ‘나도 이제 결혼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회상했다. 이미 그의 나이가 환갑을 바라볼 때였다. 그러자 누군가가 그에게 한국행을 권유했다. “프랑스에서 빵 만드는 기술을 배웠으니 한국에서 먹고살 만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한국행을 타진했다. 그러나 이내 벽에 부닥쳤다. 무국적자여서 여권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당시 그의 병적기록을 찾아봤지만 그가 수료한 대구방위사관학교의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몇 달을 들뜬 마음으로 고국행을 준비하다 실패한 그는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한 달에 두어 번씩 한국 대사관을 찾다가 그 후로는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고는 90년 퇴직한 뒤로는 전씨를 만난 사람이 거의 없다.

전씨는 웬만한 거리는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하지 않고 걸어 다니며 월급을 꼬박꼬박 저축했다. 이따금씩 “한국의 라면이 먹고 싶다”며 라면을 사러 나타나는 것이 유일한 파리에서의 쇼핑이었다. 지금도 가끔 한국 맛이 생각날 때면 라면을 끓인다고 한다.

현재 전씨는 파리의 밀가루 공장에 다닐 때부터 알고 지내는 프랑스인 르뎀 부인 집에서 더부살이하고 있다.

글·사진=파리 전진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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