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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칼럼>助演도 빛나는 세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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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인기 조역배우 조형기씨가 전하는 자신의 씁쓸한「과거」한토막.
무명시절 조씨는 리어카 배추장수역으로 TV에 잠깐 얼굴을 비추었다.『우리 아들이 나온다』고 수선을 떤 그의 노모의 말에 따라 TV를 지켜보던 동네 아주머니들의 비아냥이 터져 나왔다.
『무슨 배추장수가「배추사려」라는 대사 한마디 없느 냐』는 조소에 그의 노모는 당당히 응수했단다.『배추가 잘 팔리는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느냐』고.드라마엔「신성일.엄앵란」류의 주연만이 있던 시절 얘기다.
근래 대중문화의 흐름중 세상에 주는 가장 소중한 교훈은 바로「조역들의 성공」이다.드라마『옥이이모』에서는『옥이이모 나올 때가 제일 재미없다』고 할 만큼 모든 조역들이 다양한 개성과 이미지로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요즘 인기드라마인『바 람은 불어도』『옥이이모』는 물론『사랑을 그대 품안에』『종합병원』『서울의 달』『모래시계』등 최근 빅히트작의 공통점은 다름아닌 전 조역들의 눈부신 활약이었다.
영화도 마찬가지.『태백산맥』의 염상구역인 김갑수,『남자는 괴로워』의 만년과장 최종원,『너에게 나를 보낸다』의 여균동등은「조역의 중요성」를 대중에 각인시켜준 주인공들이다.반면 최고 스타인 이승연을 1인2역까지 시키며 내세운『거미』, 심은하와 고소영만을 부각시킨『숙희』등은 시청률 10위권에도 들지 못하는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대중문화 상품의 인기 추이는 그 시대 대중의 정서를 그대로 반영하게 마련이다.수십년간 몇사람만이 주연을 고집하며 조연의 능력을 키워나가지 않는 무대라면 대중의 식상감은 가중될 뿐이다.무대를 떠난 뒤에도 『결국 주연할 사람은 나뿐』 이라는 정치.사회쯤 되면 조연이 부상해 능력을 발휘할 땅은 없어진다.그런드라마라면 각본을 어떻게 꾸미든 풋풋하고 신선한 출연자를 끊임없이 갈구하는 대중의 변화에는 맞지 않는 셈이다.
기업.조직.가정도 마찬가지가 아닐까.몇사람의「주연」에 전적으로 의존해서는 한계를 노출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빛나지 않는 곳의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산뜻하게 발휘해 인정받을 수 있다면 그 조직은 더욱 풍성한 시너지를 뿜어내지 않을 까.이제 묻혀있는 우리 주변의「조연」들에게도 눈길을 돌려보자.
崔 勳〈대중문화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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