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길 떠나는 시’ ⑩ 『새떼를 베끼다』(위선환, 문학과지성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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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훼방 놓는다. 다시 길을 묻는다


새가 어떻게 날아오르는지 어떻게
눈 덮인 들녘을 건너가는지 놀빛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지
짐작했겠지만
공중에서 거침이 없는 새는 오직 날 뿐 따로
길을 내지 않는다
엉뚱하게도
인적 끊긴 들길을 오래 걸은
눈자위가 마른 사람이 손가락을 세워서
저만치
빈 공중의 너머에 걸려 있는
날갯깃도 몇 개 떨어져 있는 새의 길을
가리켜 보이지만
-<새의 길> 전문

위 시에는 묘한 아이러니가 숨겨져 있다.
“공중에서 거침이 없는 새는 오직 날 뿐 따로 길을 내지 않는다”는 진술을 표 나게 앞세운다. 하늘에 나 있는 길을 새들이 가는 것이 아니라 새들이 가는 길이 하늘의 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상의 인간이 하늘의 길을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늘의 길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길은 길을 떠나는 주체에게 이미 있는 것이다. 길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할 때 우리는 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자 한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아이러니는 발생한다.
시에서는 지상의 한 인간이 새의 길을 가리키고자 한다. 그것은 우리의 논점에서는 어리석은 짓이다. 하지만 그 지상이 인간이 “인적 끊긴 들길을 오래 걸은 눈자위가 마른 사람”이라면 문제는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가령 “인적 끊긴 들길을 오래 걸은 눈자위가 마른 사람”이라면 이 지상에서 방황할 만큼 방황한 길 위의 인간이지 않을까? 곧 그 역시 새들처럼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
시인이 그를 보고 새의 길을 가리키려는 어리석은 자라고 말한다면, 과연 나의 길은 타인의 길과 결코 겹쳐지거나 만날 수 없다는 것일까? 모든 길은 다 각자의 길일뿐인 것일까? 아니면, 생각의 방향을 바꿔 길 떠나는 자의 진정성을 의심해봐야 하는 것일까?
또 하나의 길의 풍경을 살펴보자.

멀리까지 걸어가거나 멀리서 걸어 돌아오는 일이 모두 혼 맑아지는 일인 것을 늦게야 알았다 돌아와서 모과나무 아래를 오래 들여다본 이유다 그늘 밑바닥까지 환히 빛 비치는 며칠이 남아 있었고

둥근 해와 둥근 달과 둥근 모과알의 둥근 그림자들이 밟히는 며칠이 또 남아 있었고

잎이 지는 어느 날은 모과나무를 올려다보며 나의 사소한 걱정에 대하여 물었으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아직 남은 며칠이 지나가야 겨우 모과나무는 내가 무엇을 물었는지 알아차릴 것이므로, 그때는 이미 모과나무 가지에 허옇게 서리꽃 피고 나는 길을 떠나 걸어가고 있을 무렵이므로

치운 바람이 쓸고 지나간 며칠 뒤에는 걱정 말끔히 잊고 내가 혼 맑아져서 돌아온다 해도

모과꽃 피었다 지고 해와 달과 모과알들이 둥글어지는 며칠이 또 남아 있을 것이고, 어느 날은 내가 잎 떨어지는 모과나무 아래로 걸어가서 사소한 걱정에 대하여 되물을 것이니…….
-<언제나 며칠이 남아 있다> 전문

시 속에서 화자는 자주 길을 떠난다. 그리고 또 돌아온다.
화자는 그 이유를 “사소한 걱정”때문이라고 에둘러 수줍게 말한다. 그러나 그는 그 “사소한 걱정”이 과연 무엇인지는 결코 발설하지 않는다. 일종의 과장이나 엄살과는 거리를 두고자 하는 시인의 품성이 반영된 듯 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다만 화자는 “멀리까지 걸어가거나 멀리서 걸어 돌아오는 일이 모두 혼 맑아지는 일”이라고 깨닫고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화자에게 떠나고 또 돌아오는 행위는 “혼 맑아지는 일”이라는 표현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듯 고통의 씻김 혹은 정화인 셈이다.
그런데 그 고통의 씻김 혹은 정화에도, 첫 번째로 인용된 시 속의 새처럼, 하나의 주체가 또한 등장한다. 모과나무가 바로 그것이다. 그 모과나무는 시인의 사소한 걱정을 듣는다. 혹은 시인은 모과나무에게 자신의 사소한 걱정을 토로한다. 그러나 모과나무는 결코 대답하지 않는다. 마치 새의 길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모과나무의 대답을 알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모과나무와 새는 등가의 이미지라고 말해볼 수도 있으리라.
그 두 이미지는 시인이 길을 가리키고(새) 답을 듣고자 하지만(모과나무), 제 길을 가고 대답을 하지 않는, 소통되지 않는 단절의 이미지다. 그렇다고 부정의 이미지인 것도 아니다. 새는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가고 모과나무는 시인이 돌아오기를 늘 묵묵하게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로움과 한결같음의 긍정적인 가치를 아낌없이 드러내고 셈이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시인은 왜 길의 인간과 또 다른 길의 주체들을 따뜻하게 소통시키고 화해시키고 않을까? 고통으로 말미암아 길을 떠나고, 길 위에서 아픈 영혼들은 정녕 만날 수 없는 것일까? 그래서 모든 길은 하나의 길이 되어야 마땅한 게 아닐까? 그게 우리들이 꿈꾸는 ‘길의 시’가 아닐까?
시인 위선환은 그 같은 ‘길의 행복’에 쉽게 자신의 시의 길을 내주지 않는다. 보라.

제, 발, 바, 닥, 밖, 으, 로, 는, 한, 걸, 음, 도, 내, 딛, 지, 못, 했, 다.
-<발자국> 전문

시인은 글자마다 쉼표를 꾹꾹 눌러 찍음으로써 우리들의 길을 아프게 되묻는다. 네가 떠났다고 여겼던 그 길이 실상은 “제 발바닥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한 하나의 포즈일 수도 있다고. 길은 포즈 혹은 제스처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을 시인은 강력하게 요구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길에 대한 이미지들이 실상은 ‘따뜻하게 가공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시인은 경고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위선환 시인은,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길의 행복을 휘저어놓는 훼방꾼이다. 시인은 할 수 있는 한 길의 행복을 한 유예시키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새의 길, 모과나무의 대답을 시인은 애써 모른다며 괄호 속으로 넣고 있다. 어쩌면 길의 홍수 속에서 그 같은 ‘중세의 길’은 너무나 아득하고 또 아득하다.

글_ 북 리뷰어 김용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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