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재 기자의 웰컴 투 풋 볼 <47> ‘와일드카드 박지성’도움 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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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아테네 올림픽 축구 예선 마지막 경기가 열린 그리스 테살로니키 경기장.

김호곤 감독이 이끈 한국은 말리에 0-3으로 끌려가다 조재진의 헤딩 두 골과 상대 자책골에 힘입어 3-3을 만들었다. 종료 휘슬이 울렸고, 한국은 사상 처음으로 예선을 통과해 올림픽 8강에 진출했다. 감격의 순간, 그런데 선수들은 전혀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벤치에서 멀리 떨어진 쪽에 모여 한동안 얘기를 나눈 뒤 곧바로 그라운드를 빠져나갔다. 나중에야 선수단 내부에 문제가 있었음을 알게 됐다. 선수 기용을 둘러싼 갈등과 알력이 있었고, 급기야 말리전 전반에 교체된 최태욱은 유니폼을 벗어 집어던졌다. 이에 분개한 코칭스태프 중 한 명이 최태욱에게 손찌검을 했다. 선수용 AD 카드가 모자라 경기장에도 들어가지 못한 일부 선수는 “이럴 거면 왜 데려왔느나”라며 반발한 일도 있었다.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 한국은 8강전에서 파라과이에 2-3으로 졌다.

당시 한국의 와일드카드(23세 초과 선수)는 유상철·정경호였다. 유상철은 최종 수비수로 나섰지만 실수가 잦았고, 한국은 네 경기에서 8실점했다. 정경호는 측면 공격수로 뛰었지만 무리한 개인 플레이로 번번이 공격의 흐름을 끊었다. 이들이 후배를 다독이고 팀 분위기를 끌어올렸다는 얘기도 듣지 못했다. 결국 와일드카드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베이징 올림픽 예선 상대가 정해졌다. 올림픽팀 박성화 감독은 애타게 박지성(사진)을 찾는다. “그가 와일드카드 1순위”라고 못박았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와일드카드 박지성’이 본인과 팀에 진정으로 도움이 될 것인지를.

프리미어리그는 5월 11일 끝난다. 맨유가 유럽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오른다면 박지성은 5월 22일 모스크바에서 결승전을 치른 뒤 곧바로 A대표팀에 합류해 남아공 월드컵 3차 예선 네 경기에 나서야 한다. 그가 올림픽에 나간다면 6월 22일 북한전이 끝난 뒤 한 달도 못 쉬고 7월 21일 소집훈련에 임해야 한다. 프리미어리그 개막은 8월 9일이고, 올림픽 개막은 8월 8일이다. 혹사에 따른 부상 위험, 맨유 팀 훈련 및 개막전 불참 등 악재가 첩첩이다. 심신이 지친 박지성이 올림픽팀 전력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분석이 그래서 나온다. 차라리 젊은 또래 선수들끼리 팀워크를 이뤄 의기투합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이후 와일드카드로 재미를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점도 시사적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도 있다. 올림픽 차출은 강제가 아닌 협의 사항이다. 맨유 퍼거슨 감독이 허락하지 않으면 박지성은 올림픽에 뛸 수 없다. 아테네 올림픽 때는 박지성이 와일드카드가 아니었는데도 당시 소속팀(에인트호번) 히딩크 감독의 반대로 출전하지 못했다. 심사숙고해 판단을 내리기를 기대한다.

정영재 기자·축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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