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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의 달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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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구미속초(狗尾續貂)’란 말이 있다. 문자 그대로 개 꼬리로 담비 꼬리를 잇는다는 뜻이다. 옛날 중국의 관리들은 담비 꼬리로 장식한 관모를 썼는데 관직을 남발하다 보니 담비가 동이 나 어쩔 수 없이 개 꼬리를 모자에 달았다는 고사를 일컬음이다. 담비 꼬리 걱정할 일 없는 요즘 세상에 이 고사가 새삼 새로운 것은 나라 인사가 영 기품 없는 까닭일 터다.

일 잘하기로 따를 사람이 없는 우리 대통령은 인사만큼은 달인이 아닌 모양이다. 청와대 비서관 인사 때나 정부 각료 인사 때 온갖 신조어들을 뛰놀게 해 세상을 시끄럽게 하더니 처음 하는 재외공관장 인사 역시 매끄러운 모양새가 아니다.

 어쩌면 대통령 자신이 워낙 부지런하다 보니 아랫사람은 아무나 시켜도 스스로 만기친람(萬機親覽)하면 될 거라 여기는지도 모르겠다. 주재국도 모르게 대사 자리를 내던지고 들어와 선거일을 돕던 사람을 다시 그 나라 대사로 보내고, 역시 선거캠프에서 일하던 미국 시민권자 교포를 총영사에 임명하는 해프닝이 그래야 이해가 된다. 주재국이 몰랐으니 아그레망을 다시 받을 필요 없어 좋고, 한국 사람이 아니라도 임명 전에 국적을 회복하면 그만이라는 놀라운 ‘실용주의’다. 그게 아니면 밑에서 대통령의 구미에 맞는 반찬으로 한 상을 차려 올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 쳐야 대선캠프에서 일하던 공신을 다섯이나 공관장으로 보내면서 임명한 지 8개월 된 주 유엔대사를 전 정권 사람이란 이유로 경질하는 요지경 속을 이해하기 쉽다.

경우야 어쨌든 이런 인사 파행이 계속되는 건 곤란하다. 인사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앞으로 거듭 그럴 수 있다는 말이고, 그래서 더 불안하고 걱정스럽다. 우리의 최고인사권자한테 송 태조 조광윤의 인사술을 소개하고 싶은 이유다.

조광윤은 인사의 달인이었다. 그는 장군 조빈에게 제후국 남당(南唐)을 토벌할 것을 명령하면서 말한다. “공을 세워 제후나 재상이 되는 것은 누구나 바라는 바요. 자, 기회가 왔소. 그대가 승전고를 울리며 돌아오는 날 승상의 자리는 경의 것이 될 것이오.” 크게 고무된 조빈은 군사를 이끌고 남당으로 진격했다. 단숨에 남당을 무너뜨리고 황제를 참칭하던 이욱을 포로로 잡았다. 조정에 돌아온 조빈은 기대에 부풀어 황제가 약속을 이행하기만 기다렸다.

하지만 조광윤의 말은 달랐다. “지금은 세상이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상황인지라 경의 힘을 빌려야 할 곳이 많소. 하지만 승상은 신하로서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자리요. 만약 경이 승상이 된다면 더 이상 신명을 바쳐 싸우려 하지 않을까 두렵소. 그것이 경을 승상에 임명하지 않는 이유요.” 조빈은 실망해 물러났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보니 방안에 금은보화가 쌓여 있었다. 황제가 내린 상이었다. 그가 어떤 기분이었을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죽는 날까지 황제에게 충성을 다했다.

 조광윤은 공신들에게 관직을 남발하는 대신 경제적 보상을 해준 것이다. 돈으로 보상받은 사람의 능력이 모자라면 저만 빈털터리가 되고 말뿐이지만, 자리를 얻은 사람이 능력 없으면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나라를 위태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 통일을 완성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인사 철학이기도 했다.

정부가 바라는 대로 지난 정권에서 임명된 공기업 수장들의 줄사퇴가 이어지는 요즘이다. 때맞춰 대통령은 공기업 간부들의 턱없는 연봉을 깎으라고 주문했다. 하는 일에 비해 부풀려진 공기업 임금체계를 바로잡는 건 잘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공신들의 논공행상을 자리로 하려는 데 조금이나마 죄의식을 덜려는 의도는 아니길 진심으로 바란다. 구미속초의 주인공 사마륜은 즉위 4개월 만에 황제 자리를 빼앗기고 독배를 마셔야 했다. 조광윤은 송나라 300년 역사의 기틀을 다졌다. 어느 길이 옳은 길인지는 설명이 필요없을 터다. 대통령을 위해서도 그렇고 국민을 위해서도 그렇다.

이훈범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