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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가의 향기, 사람의 향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8호 17면

조선 후기 전남 고흥을 본향으로 일대 치부를 한 보성 선씨 가문은 선덕을 베풀었다. 빼어난 장사 솜씨로 막대한 부를 이룬 선씨 일가는 명당을 찾아 속리산 바깥의 충북 보은군 외속리면 하개리에 99칸 집을 짓고 거기에 33칸을 덧대었다. 이 땅에 남아 있는 개인주택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고택이다.

웅장한 집은 일가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위선최락(爲善最樂·선을 행하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다)’을 가풍으로 삼았던 일가는 무료 교육시설인 관선정(觀善亭)을 열고 방방곡곡의 유능한 수재들을 모아 가르쳤다. 이름 높은 학자 임창순·변시연 등이 관선정에서 학문을 닦았다. 그때의 전통은 지금도 변함없이 이어져 전국 고시생 1000여 명에게 내당을 제공하고 있다.

이곳의 땅붙이들은 “논밭을 소작인들에게 고루 나눠주고 세금도 대신 내줬으며 소작도 크게 경감하여 어려운 이들에게 배고픔을 모르게 했으니 부자이면서도 어진 분이라 그 은혜에 감사한다”고 시혜비를 세웠다. 보성 선씨 영흥공파 21대 종부 김정옥씨는 집안 어른으로부터 들은 선대의 덕행을 가슴에 품고 있다.

“정자 훈자 할아버님은 인품이 뛰어나 주위의 존경을 받으셨다고 해요. 한국전쟁 당시 마을 주민들이 북한군으로부터 총살당할 위기에 놓였는데 할아버님이 북한군을 설득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스물넷에 시집와 서른두 해째 종부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김정옥씨는 이즈음 보이지 않는 것의 중요성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고 한다.
“예전에 시어머님께서 ‘음식은 정성이다’고 말씀하실 땐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이젠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요. 한날 한시에 담근 된장도 어떤 것은 맛이 있고 어떤 것은 맛이 없어요. 정성의 차이지요. 마음이 좋지 않을 때 만든 음식도 맛이 나지 않아요. 내 마음에 흡족한 음식을 만들려면 미치지 않으면 안 돼요. 자식 키우는 것만큼, 아니 그보다 더 정성을 기울여야지요.”

음식 솜씨 빼어난 김정옥씨가 보은군 향토음식연구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사람에게 강조하는 것도 역시 ‘정성’이다. 그는 특히 인스턴트 식품에 물든 젊은이들이 전통음식을 어렵고 먼 것으로만 여기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요즘 젊은이들은 장떡을 잘 먹지 않는 것 같아요. 장떡만큼 만들기 쉽고, 맛도 좋고, 영양가 높은 음식도 없어요. 밀가루에 된장·고추장·호박·부추·고추를 넣고 부치기만 하면 되는데. 감칠맛 나고 오돌하니 씹는 맛도 그만이죠. 간 하나만 바꿔도 깊은 맛을 낼 수 있어요. 소금 대신 집간장으로 간을 해 보세요.

물김치할 때 간장으로 간을 하면 장김치가 되는데 담백하니 참 맛있죠. 국수를 할 때도 밑간은 꼭 집간장을 해야 돼요. 요즘처럼 봄나물이 한창일 때는 된장 소스를 만들어 무쳐도 좋죠. 된장에 멸치를 넣고 졸이다가 양파·풋고추·부추 등 갖은 채소를 넣고 끓여 만든 된장 소스로 나물을 무치면 맛이 좋아요.”

대종갓집 살림을 하면서 고시원 학생들의 음식을 손수 챙기고 향토음식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에게 솜씨 비결을 가르쳐주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는 김정옥씨. 그동안 많은 이들을 만났는데 꼭 한번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한다.

“1998년 수해가 크게 났을 때였어요. 충주에서 건설업을 하신다는 분이 자제분을 데리고 찾아오셨습니다. 빵을 가득 가져오셔서는 흙탕물 천지인 방들을 깨끗이 치워 주셨어요. 그때는 경황이 없어 감사하단 말씀만 드렸는데 음식 대접을 하고 싶어요. 이 기사를 보신다면 꼭 연락해주셨으면 좋겠네요.”

350년간 맥을 이어온 덧간장의 깊은 맛, 그 속에는 뿌리 깊은 명가의 향기, 아름다운 사람의 향기가 더해져 있어 진가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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