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레터] 날림 번역서 리콜 … 소중한 ‘독자의 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군주와 사람들 간에 존재하는 덕목에 관한 상호 간의 몰이해는 마키아벨리가 이 둘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도록 양심을 재정의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문장의 뜻을 이해하셨습니까. 최근에 나온 한 책에서 찾은 글귀입니다. 솔직히 저는 이해하기 어려워 여러 차례 반복해 읽어야 했습니다. 글이라는 게 이렇게 중간 토막을 똑 떼어 놓고 읽어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문장 많이 어색하지 않은가요?

혹시나 해서 책을 계속 읽어봤습니다. 이런 귀절도 눈에 띕니다. “인간 당파심에 대한 치료법은 찾을 수 있지만 혼합 체제 내에서 덕목을 혼합하고 실패했을 때, 인간이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자연을 남겨두는 고전적인 완화책이 아니라 속박으로부터 풀려난 당파적 기질의 새로운 혼합이다.” 휴우~, 제게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저는 이게 초고본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좀 거칠어보이지만 공들여 다듬어지기를 기다리며 번역가의 PC에만 은밀하게 저장된, 1차 초고여야 한다고요. 그런데 아닙니다. 이 책은 500쪽이 넘고요, 하드 장정으로 제본돼 서점에 나와 있습니다. 이 책을 고를지도 모를 사람들을 생각하니 왠지 제 마음이 다 조마조마해집니다.

하지만 이처럼 엉성하게 번역돼 나오는 책이 어디 이 책뿐이겠습니까. 국내 출판계에서 번역서가 차지하는 큰 비중을 생각하면 부실 번역, 날림 번역을 만날 가능성은 작지 않습니다. 지난 해 우리나라 연간 종합 베스트셀러 30위권 도서 가운데 번역서가 16종으로 늘었습니다. 2001년에는 11종이었습니다. 세계에서 번역서가 가장 많이 출판되는 나라 중의 하나로 우리나라가 들어간다고 합니다. 양에 있어서는 손에 꼽힌다는 얘기입니다.

문제는 질입니다. 정확한 번역입니다. 지난 2월 출판전문잡지 『기획회의』에서 현재 우리나라에서의 번역출판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뤘습니다. 전문 번역가의 필요성, 편집자의 역할 등이 모두 언급됐습니다. 한 번역가는 “번역에 할애되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 큰 문제”라고도 말했습니다.

저는 번역 문화를 업그레이드 할 사람은 독자라고 생각합니다. 번역의 향상을 출판사의 양심에만 기대는 것은 시장의 원칙에도 어긋납니다. 몇 년 전 한 유명 인터넷 서점에서는 졸속 번역된 책에 대한 독자들의 항의 리뷰가 빗발치자 책을 모두 회수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출판계에서 리콜제가 종종 실시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출판인들이 가장 의지하는 대상이면서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은 바로 독자입니다.

그러고보니, 그동안 재미있게 읽은 번역서들이 새삼 고맙게 여겨집니다. 번역의 중요성을 아는 깐깐한 편집자가 고맙고, 원문과 씨름하며 글을 다듬어준 번역가가 고맙습니다. 책이 선사할 수 있는 감동은 책 속에만 있는 게 아닌가 봅니다. 

이은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