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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Leisure] 합천 황매산 자락에 태극기 휘날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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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태극기 휘날리며'가 드디어 전국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실제를 방불케 하는 전투 장면은 도대체 어디서 찍었을까.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평양시가지 전투와 두밀령 고지전투, 낙동강 방어선 전투 등 굵직굵직한 대규모 전투 장면의 주요 촬영지는 경상남도 합천이다. 합천군 용주면 합천댐 아랫녘 수자원공사 부지 2만2000평에 자리한 평양시가지 야외세트는 약 2개월간 제작비 16억원을 들여 제작됐다. 세트장은 촬영이 끝난 뒤 관광객들이 볼 수 있게 개방해 놓았다.

합천군은 증기기관차.탱크.장갑차 등의 촬영소품을 임대해 서바이벌게임장으로 활용할 예정이며 세트장 체험코스를 둘러보는 여행 상품을 내놓을 계획이다.

#1.역사 추억하는 관람객 발길

경남 합천 용주마을. '태극기…'의 주요 촬영지인 평양 시가지전 세트가 있는 곳이다. 동이 튼 선새벽의 세트장은 전쟁터마냥 스산하고 우울하다. 길 건너편에 바라보이는 강줄기의 물안개가 옅은 봄바람에 안개처럼 밀려든다. 마치 불타버린 전쟁터의 잿더미에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푸르스름한 적막감이 감도는 세트장을 저벅저벅 걸어간다.

생존자가 아무도 없는 듯한 '평양 시가지'중심부. 인천 상륙작전 이후 북으로 진군을 시작한 국군이 평양 시가지에서 대규모 적군과 만나 시가지전을 벌인 장면을 촬영한 곳이다. 극장.병원.미용실.선술집 등 50채 건물로 이루어진 평양 시가지 모형과 삐라. 현수막.벽보 등이 당시의 분위기를 한층 돋운다.

45도쯤 어슷하게 기울어져 금세 무너져 버릴 것만 같은 건물 쪽으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긴다. 부서진 건물 외벽의 파편과 깨진 유리알갱이가 길바닥에 전쟁의 흔적처럼 그대로 나뒹군다. 세트장으로 들어서는 초입에 일그러진 군용트럭 한 대가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다.

트럭 잔해를 지나면 커다란 폭발음과 울부짖는 신음소리, 처절한 비명과 차가운 쇳소리 등 영화의 효과음이 낡은 확성기를 통해 세트장 전체에 쩌렁쩌렁 울린다. 검게 그을린 건물의 거대한 세트는 전투 장면의 서늘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영화 속 진태가 혈혈단신으로 적진을 뚫고 들어가 기관총을 잡고 포효하던 건물, 벽 한쪽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선동적인 구호의 벽보가 생경하다.

전봇대에 매달려 찢어진 채 나부끼는 붉은 깃발에 이른 봄 햇살이 들기 시작하자 세트장으로 관람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아득한 역사의 기억을 반추하며 남녀노소의 관람객들이 마치 전쟁터의 생존자처럼 밝은 미소를 지으며 평양 시가지 거리를 가득 메운다.

전쟁을 체험하지 못했던 젊은 세대들은 군복.군화.철모.군장 등 소품에 유별난 호기심이 동해 직접 입어보고 사진 촬영에 즐거워한다. 전쟁을 체험한 지긋한 세대들은 그저 말없이 불에 그을린 붉은 깃발의 그림자 아래 한참을 멍하게 서 있을 뿐이다. 장동건.원빈 등 주연 배우의 사진을 담은 대형 현수막 아래, 빛 바랜 군복을 입고 총을 들고 서 있는 초등학생들의 웃음 위로 태극기가 휘날린다. 아이의 평화로운 미소를 담고 두밀령 고지 전투 장면을 촬영했던 황매산 정상으로 진격하듯 달린다.

#2.영화 속의 두밀령은 황매산

영화 속의 마지막 전투 장면에 등장하는 두밀령은 실제로 어디인가. 두밀령은 실제의 지명이 아니다. '두밀령 고지 전투'도 당연히 전사(戰史)에서는 그 이름을 찾아 볼 수 없다. 당시 중공군의 참전으로 압록강 전선에서 밀려 다시 중부전선에서 밀고 밀리는 싸움을 거듭하던 시기를 묘사한 가상의 전투지다. 48일간의 혈투가 벌어졌던 두밀령 전투 장면을 촬영한 곳이 바로 합천군립공원 황매산(해발 1108m)이다. 합천군 대병면 가회면과 산청군 차황면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소백산맥에 속하는 고봉으로 영남의 소금강으로 불리며, 700~900m의 고위(高位) 평탄면 위에 높이 약 300m의 뭉툭한 봉우리를 얹어놓은 듯한 모습이 가히 전투적이다.

삼라만상을 전시해 놓은 듯한 모산재(767m)는 바위산이 절경이며 그 밖에 북서쪽 능선을 타고 펼쳐지는 황매평전의 철쭉 군락과 무지개터, 황매산성의 순결바위, 국사당(國祠堂) 등이 볼 만한 곳으로 꼽힌다. 영화 '단적비연수' 야외 세트와 고개 하나를 두고 떨어져 있는데, 강제규 필름 측에서 '태극기…' 촬영을 위해 미리 점찍어둔 명당 자리였다는 후문. 제작진은 한 달에 걸쳐 산 정상에 각종 교통호와 진지를 구축했고 역사상 길이 남을 스펙터클한 전투액션을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두밀령 전투.낙동강 방어선 전투 장면 등의 촬영이 이루어진 곳은 초록색 산불 방지초소를 바라다보고 왼편 아래쪽부터 황매산 삼봉 아래 붉은 황토 언덕까지다.

머리만한 검은 호박돌로 이뤄진 돌산에 참호선을 구축하고 실제로 까마득한 경사를 기어오르며 찍은 장면은 '태극기…'의 '명장면을 만들어 냈다. 축축한 습지의 땅과 거친 황무지는 대규모 육박전 전투 촬영을 찍기엔 안성맞춤.

황매평전이라 일컬어지는 나지막한 능선을 따라 검은 포흔의 흔적을 찾는다. 하지만 황매산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영화촬영의 세트는 촬영 직후 자연생태 보존의 일환으로 모두 복원됐다.

다시 찾아온 평온함, 전쟁이 끝난 평화로운 산은 이제 나른하고 편안하다.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몇몇 상춘객이 숨숨 봄을 밟으며 산을 오른다. 이제 황매산 두밀령 격전지에는 금잔디가 동산 가득하고 핏빛 아우성 대신 등산객들의 봄을 맞는 환호가 메아리친다.

"4월이면 철쭉이 핏빛으로 물들어 흐드러질 게야."

황매산 아랫녘에서 평생을 살아온 팔십 촌부의 지나는 말투가 사뭇 무심하게 들리지 않는다.

"우린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야 해." 영화 속 두 형제의 울부짖음이 유난히 맑은 하늘 저편에서 들리는 듯하다.

글.사진=자유기고가 이강

*** 여행 쪽지

평양 시가지 세트장은 무료로 개방된다. 비교적 넓은 주차장이 마련돼 현재 영화 '바람의 파이터'를 촬영하고 있다. 때문에 세트장을 구경하려면 영화 촬영 일정을 확인하고 떠나는 게 좋다. 합천군청 055-930-3751.

수도권에서 찾아갈 경우 대전~진주간 고속도로 함양 분기점→88고속도로→거창 나들목→26번 국도→24번 국도→33번 국도 합천읍 방향→합천읍 시내를 거쳐 남정교 앞에서 합천댐 방향으로 우회전→합천댐 방향으로 10㎞쯤을 달리다 보면 오른편으로 10여개의 태극기가 나란히 펄럭인다. 평양 시가지 세트장이 있는 곳이다.

황매산은 평양 시가지 세트장을 나와 우회전 해 합천댐 수문→삼거리에서 대병쪽 좌회전→황매산 만남의 광장에서 우회전→1089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다 황매산군립공원 등산로쪽으로 비포장 길을 따라 정상까지 간다. 합천댐까지 가는 길은 평탄하지만 황매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목은 비포장 길과 포장길이 번갈아 이어져 순탄치 않으니 승용차는 운전을 조심해야 한다. 주변 숙박지로는 세트장에서 합천댐 쪽으로 오르다 왼편으로 합천댐 수문 맞은 편에 있는 '합천댐 관광농원'(055-932-0036)이 추천할 만하다. 철이 좋은 자연산 메기 매운탕과 황토초가집.찜질방 등 먹을거리와 즐길거리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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