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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경기서 14골 넣은‘쉬메릭’선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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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프로축구 K-리그 초반에 화끈한 공격 축구로 주목받는 대구 FC. 이 팀에 무서운 선수가 있다. 그는 올 시즌 6경기에서 대구가 넣은 14골을 혼자 기록했다. 뿐만 아니다. 프리킥·코너킥, 심지어 스로인까지 도맡아 한다. 이 선수의 이름은 ‘쉬메릭’이다.

물론 웃자고 하는 얘기다. 쉬메릭은 대구시에서 생산되는 의류·패션 제품의 통합 브랜드다.

대구 FC는 올해 유니폼의 등번호 위에 붙이는 선수 이름을 빼고, 쉬메릭이라는 광고 문구를 붙였다. 그리고 대구시로부터 협찬금으로 7억원을 받는다.

‘쉬메릭 소대’를 이끌고 있는 변병주 감독의 논리는 단순하고 명쾌하다. “어차피 우리가 우승을 노릴 수 있는 전력은 아니다. 그렇다면 팬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축구, 골이 펑펑 터지는 축구를 하고 싶다.”

2무승부로 승점 2점을 따기보다는 1승1패로 3점을 얻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구는 개막 이후 한 번도 비긴 경기가 없었다. 그렇지만 성적은 좋다. 정규리그는 3승2패로 14개 팀 중 5위를 달리고 있다. 삼성하우젠컵 대회에서도 강호 성남 일화를 꺾었다.

변 감독은 ‘원석’을 다듬어 ‘보석’으로 만들어내는 데도 재주를 가졌다. 인천 유나이티드에서 2군을 전전하던 ‘10번 쉬메릭’ 이근호를 데려와 지난해 최고의 블루칩으로 재탄생시켰다. 이근호의 부평고 동기인 ‘7번 쉬메릭’ 하대성도 울산 현대에서 방출되다시피한 선수였지만 지난해부터 대구의 주전 미드필더로 맹활약하고 있다. 그는 최근 베이징 올림픽 대표팀 예비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9번 쉬메릭’ 장남석도 벌써 3골을 넣으며 만개할 채비를 갖췄다.

선수들의 이름을 빼고 그 자리에 광고를 넣어야 할 정도로 형편이 넉넉지 않은 시민 구단에서 매년 이렇게 좋은 선수가 나오는 이유는 뭘까. 대구 최종준 사장은 ‘기회’라는 한마디로 설명했다. 다른 팀보다 선수층이 엷고 스타선수가 적다 보니 본인만 열심히 하면 꾸준히 출장 기회를 얻게 된다는 것. 반대로, 대구에서 기량을 인정받아 ‘부자 구단’으로 옮긴 선수들은 두터운 선수층에 막혀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는 게 최 사장의 설명이다.

한국 프로축구는 ‘기업 구단’과 ‘시(도)민 구단’으로 크게 나뉜다. 수원 삼성, 울산 현대 등은 모기업의 자금 지원을 받아 운영한다. 대구를 비롯해 대전·인천·경남은 시(도)민의 자발적 참여로 돈을 모아 만든 구단이다. 그러니 기업 구단에 비해 형편이 어려운 게 사실이다.

지난해 프로야구 현대 유니콘스의 해체는 기업 구단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아무리 명문 구단도 모기업이 손을 떼면 하루아침에 간판을 내려야 한다. 한국야구위원회(KBO)가 나서 백방으로 인수할 팀을 찾았지만 KT·농협·STX가 모두 막판에 고개를 저었다. “1년에 200억원 가까운 돈을 쏟아부을 명분이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외국계 투자자문 회사가 현대를 인수했고, 이들은 담배 회사에 팀 이름을 팔아 운영비를 마련했다.

최 사장은 시민 구단 앞에 ‘열악한’이란 수식어를 붙이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그는 LG·SK 등 부자 야구단의 단장을 역임했고, LG 축구단 단장 경력도 있다. 최 사장은 “시민 구단은 한국의 프로스포츠가 가야 할 방향이다. 어려움은 있지만 우리도 세 끼 밥 잘 먹고, 전지훈련도 좋은 데(터키) 다녀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구단 운영의 거품을 빼고 시민과 밀착한 팀을 만들겠다는 게 그의 목표다.

대구는 애향심과 자존심이 남다른 고장이다. 화끈한 대구 사람들이 화끈한 대구 축구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쉬메릭 소대’의 유쾌한 진군을 지켜보면서 국내 프로스포츠의 현재와 미래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정영재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