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럼>쌀,보낼것인가 말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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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함흥에서 사람을 30만명이나 모아 치렀다는 북한의 광복 50주년 기념행사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내속에는 멍하니 두 갈래 느낌이 흘렀다.「굉장하다!」라는 것이 그 하나였고,「저 잔치에 모인 사람들을 먹일 쌀은 남한에서 갔다!」 라는 느낌이다른 하나였다.
굉장하다는 것은 이데올로기 내지 정권이 인민을 부리는 그 매스게임의 규모와 숙련을 보고 생긴 느낌이었다.이런 매스게임은 광복의 기쁨이나 통일의 희망과는 차라리 별도일 수 있다.주체사상이라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인민에게 건 최면술에 따른 열병(閱兵)일 따름일 수도 있다.「북한」이라는 개념처럼 사람을 오도하는 단일화는 드물다.반드시 북한 정권과 북한 인민은 따로 떼어놓고 나서 어떤 미세한 느낌이라도 서술해야 할 것이다.
이런 매스게임을 곧장 북한 인민의 정체라고 계속 오해하고 있는 사람은 통일이 되고나면 북한 사람을 오히려 2류 국민이라고차별하려 드는 그런 사람이 필경 될 것이다.이런 차별대우는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북한 이데올로기에 대해 지금은 호기적(好奇的)인 호의를 느끼고 있는 이른바 진보주의자 가운데 일부에 의해저질러지게 될 공산이 있다.이 사람들은 자기의 호기심을 정당화할 목적 때문에 북한 정권과 북한인민을 동일한 것이라고 기만적으로 묶어두려고 한다.
기술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최고로 숙련된 이런 대규모 매스게임은 실은 북한 정권의 중앙계획적이고 집단적 생산방식의 본래 모습이다.이런「생산방식」자체가 실은 북한 체제의 주된「생산물」이다.무지무지 비싼 생산비를 부어넣어 만드는「주산물 」이다.인민들은「이밥」도「고깃국」도 그저 아무때 아무곳에서든 매스게임만 잘 해내면 술술 배급나오는 것으로 믿게 되고 말았다.이 때문에저켠에서는 인간의 모사(謀事)능력이 이런 매스게임 분야를 제외하면 아마도 철저하게 황폐화되고 말았 을 것이다.논밭이나 공장에서도 단지 매스게임만 잘 하고 있다.
이렇게 되니 북한경제는 저축이나 새기술 같은 확대재생산적 알은 아예 배지도 낳지도 못하는 생식 불능이 되고 말았다.세계 모든 공산주의 경제가 궤멸하고 만것도 이 까닭이다.사태가 갈데까지 진전되어 확대재생산은 커녕 인민을 먹일 양식 마저 부족하게 되자 중국이나 베트남에서는 공산정권 자신이 농업에서부터 시작하여 중앙계획적 집단생산 체제를 양보하고 자유화와 시장화를 단행하였다.
북한만은 세습으로까지 퇴행한 철저한 이데올로기 권력을 유지해내려고 아직도 집단 경작과 식량 배급을 철저히 고수하고 있을만큼 공산주의의 식은 재를 끌어안고 있는 유일한 나라다.자유화.
시장화 대신에 평양 정권은 남한에 식량을 보태달 라고 요청해 왔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 하나는 2차대전 후 모든 경제원조는 수혜국이 독재정권일 때는 독재자의 집권 기간을 연장해주고 배를 뚱뚱하게 하는 데에,그리고 정부지시 경제체제일 때는정경유착과 빈익빈 부익부 현상의 심화에 가장 우선적 으로 공헌해 왔다는 점이다(남한은 이 점에서 4.19이래 釜馬사태,광주항쟁을 거쳐 6.29까지 끊임 없는 시민봉기가 독재정치를 몰아내고 정부의 경제 간섭을 축소시켜 왔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그리고 특히 양곡을 대량 계속적으로 원 조하면 수혜국의 농업만 결딴내고 말더라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다시 말해 남한이 북한에 쌀을 보내면 이것은 굶주리는 북한 인민에 앞서 북한 정권의 유지를 위해서 먼저 봉사한다.북한 인민은 점점 효율적 생산활동보다 매스게임에만 참가하 면 밥이 나온다는 미신에 빠져들 것이다.북한의 농업은 점점 황폐해 질 수밖에 없다.북한에 쌀을더 보낼 것이냐 말 것이냐,이것은 쌀을 싣고 간 배에 인공기를달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 다음에는 쌀배 한 척을 억류까지 했지만,이런 것에 좌우될 일이 아니다.나는 북한 정권이 적어도농업 생산을 농민에게 자유화하고(북한 안에서의)양곡 유통을 시장화할 때 까지는 북한에 쌀 원조를 해서는 안된다고 본다.다만보통 사람은 알 수 없는 무슨 특별한 사정이나 감춰진 목적 이따로 크게 있어서 남한이 북한에 쌀을 대 주기로 한 것이었다면그건 별도의 문제겠다.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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