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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스살롱>독립기념관 趙一文이사장 부인 안정애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동네사람에게 독립기념관 이사장 조일문(趙一文.77.서울마포구상수동354의8)박사댁이 어디냐고 묻자 『저기 꼭 독립기념관 같이 생긴 나무대문집이오』라고 일러준다.세월의 연륜이 묻어나는육중한 아치형 나무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신라시대 연꽃무늬를 아로새겨 구운 검은 전돌 벽면이 고풍스런 이집 분위기를 전해주는듯하다.趙박사와 부인 안정애(安貞愛.67)씨가 20년前 평생 처음으로 지었다는 1백평 남짓한 이 집에서 노부부는 광복50주년을 맞는 남다른 감회에 젖어있었 다.
『애들 할아버지(5명의 손자.손녀가 있어 安씨는 趙박사를 이렇게 부른다)와 함께 1940년대 광복군에서 활동했던 중국인 친구가 광복 50주년을 맞아 한국을 방문해 우리집에 오셨어요.
두분이 얼싸안으며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니 해방의 감격이 되살아나는 듯해요.』 해방 당시 열일곱 꽃다운 나이였던 安여사가 반세기를 거슬러올라가 더듬어본 기억의 저편에는 되찾은 조국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趙이사장의 열기가 아직도 생생히 느껴진단다.
따져보면 47년이란 세월을 동고동락한 남편과의 만남도 조국광복이 가져다 준 인연이었다.46년 철기(鐵驥)이범석(李範奭)장군이 이끌던 민족청년단에 趙박사는 선전부장으로,安씨는 여성부 단원으로 각각 활동했던게 인연이 돼 48년6월 혼 인했기 때문.결혼식에는 백범(白凡)선생을 비롯,조소앙(趙素昻).엄항섭(嚴恒燮)등 임시정부 사람들이 빠짐없이 참석해 이들 「신식부부」를축하해줬다.
신혼초기엔 고생도 했다.48년 趙박사가 백범선생을 따라 통일된 조국을 만들자는 일념으로 남북협상을 하러 평양에 갔다온게 죄(?)가 돼 투옥되기도 하고 계속적인 감시를 당했기 때문.당시엔 趙박사가 평양에 간다는 사실조차 잘 몰랐던 햇병아리 새댁이었던 탓에 많이 놀랐다고.이후 숙대와 건국대 교수를 거쳐 건국대 총장으로 정년퇴임하기까지 趙박사가 학자의 길을 걷는 동안그 또한 배움의 길과 가르침의 길을 걸으며 자아실현이라는 「앞서가는」 여성의 삶을 게을리하지 않 았다.
언뜻 보기엔 동네할머니같이 수수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워낙 활동적인 성격 때문에 그냥 살림만 하고 살기에는 흡족지 않았다고.게다가 해방직후 민족청년단 활동으로 박순천.황신덕.박승호씨등 여성계 거물(?)과 인연을 맺었던 영향 때문인 지 배운만큼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은 평생 변치 않았단다.14년간 성신.풍문여고 교사로,이후 18년간 대한적십자사 부녀국장으로 재직했고 풍문여고 교사시절엔 성균관대 서양사학과 대학원에 진학,40대 초반에 늦깎이로 석사학위까지 받았을 정도.
『석사과정 시험을 치러갔을때 대학교수님인가봐 하고 주위학생들이 수군거려 혼자 웃었다』는 그의 석사학위 논문제목은 「프랑스혁명과 여성의 신분권 운동」.
『논문쓸때 趙박사에게 야단도 많이 맞았다』며 은근히 남편의 외조를 자랑하는 그는 철오(哲午.47.과학기술대학교수).대순(大舜.44.원자력병원의사).정우(正宇.40.교육개발원 연구원)등 세아들을 모두 박사로 키워낼 정도로 자식농사에 도 성공을 거뒀다.『그냥 부모가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게 산 교육』이란게 신념.
〈文敬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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