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광복50년-경제생활 어떻게 바뀌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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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求職(구직)이란 글자를 쓴 종이를 가슴에 단채 중절모를 눌러 쓰고 서있는 남자의 흑백 사진」「지하철 역과 공원에 앉아 먼 산을 쳐다보는 동남아 국가 출신 근로자의 모습…」.이 두 장면은 우리 경제가 걸어온 발자취를 한 눈에 보여 주고 있다.
첫번째 사진은 6.25 전쟁의 아픔이 곳곳에서 묻어 나오던 53년 당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고단한 남정네의 절박함을 그대로 보여준다.다음 장면은 10만명이 넘는 외국인 근로자가 국내에 들어와야 할 정도로 어렵고 힘들며 위험한 일 (3D업종)을 기피하는 최근의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광복(光復)50년,우리나라의 경제 지도는 놀랍게 바뀌었다.50년대 우리의 아버지와 형들은 배가 고팠다.일을 하려 해도 일자리가 없었다.당시 인구는 지금의 절반도 안됐는데 실업자는 1백27만명으로 요즘 실업자의 세배나 됐다.
전후(戰後)복구 사업에는 미국의 잉여 농산물 원조가 큰 힘이됐다. 60년대 들어 본격적인 경제 개발의 몸부림이 시작됐다.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자」라는 구호가 나왔으며 이는 고속 성장의 상징인 한강의 기적으로 이어졌다.
68년 시작된 경부고속도로 건설공사가 70년 마무리돼 산업동맥 역할을 맡았고,70년에는 마산 수출자유지역 조성 공사가 시작됐다. 새마을운동은 우리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77년 우리는 대망의 「수출 1백억달러」 고지를 넘었다.포항제철 제1기 설비가 준공돼 용광로의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80년대 우리 경제는 중화학 공업의 약진으로 더욱 기반을다졌다.환율.금리.유가등 이른바 3저(低)현상에 힘입어 86년국제수지가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했다.그러나 90년부터 다시 적자로 돌아섰다.그래도 외채 망국론(亡國論)에서 벗 어났다.
90년대 우리 경제의 몸짓은 더욱 커져 교역규모 2천억달러를달성했으며 올해는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 시대를 눈앞에 두고있다.그러나 이같은 성장을 이뤄내는 과정에서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기업들이 더 이상의 사채(私債)를 견뎌내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고리채(高利債)를 정리하기 위한 8.3사채 동결 조치(72년)가 취해지기도 했다.그동안 일자리가 많아지고 소득도 높아졌으나 빈부 격차에 따른 계층간 갈등은 시급한 해결 과제로부각되고 있다.외형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삶의 질은 상대적으로낮다. 〈梁在燦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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