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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근본주의>6.흔들리는 首長國 사우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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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기(國旗)는 이슬람敎와 국가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대지를 의미하는 녹색 바탕에 『알라 외에다른 神은 없으며,무하마드는 그의 사성(使聖)이다』는 이슬람의신앙고백이 흰 아라비아문자로 쓰여 있다.그 아 래에 그려져 있는 초승달 모양의 신월도(新月刀)도 이슬람의 상징이다.
이슬람 수장국(首長國)을 자처하는 사우디는 탄생에서부터 이슬람 근본주의와 분리할 수 없었다.19세기말 『코란으로 돌아가자』는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인 「와하비 운동」을 일으켜 아라비아반도를 차지한 인물이 바로 사우디아라비아 초대국 왕 압둘 아지즈 이븐 사우드(1902~53년 재위)였다.
사우디 現국왕 파하드는 이란의 故호메이니翁이 사우디를 가리켜「위선의 이슬람」「미국의 이슬람」이라고 비난하자 86년부터 「폐하」라는 호칭 대신 메카와 메디나를 지키는 神의 대리인이란 의미에서 「두 성지(聖地)의 충복」으로 바꾸었다 .
사우디는 지금도 샤리아(이슬람법)를 법률로 채택해 살인자에 대해서는 참수형(斬首刑)을,절도범에 대해선 수족절단형을 시행하고 있다.
겉으로만 보면 가장 엄격한 이슬람 근본주의의 국가가 바로 사우디다.하지만 사우디는 석유 발견 이후 근대국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겉과 속이 다른 묘한 2중국가로 변해갔다.
79년 11월20일,이슬람曆으로 1400년 1월1일에 일어난메카의 알 하람 대사원 습격은 이러한 사우디의 허구에 정면으로도전한 사건이었다.
하지(메카순례)를 마친 일단의 젊은이들이 총기를 들고 이슬람정화를 외치며 메카를 점령했다.이집트 무슬림 형제단등 각국 이슬람 근본주의자들로 구성된 이들은 사우디 왕정이 서구 석유자본에 예속돼있으며,富의 불공정 분배등 이슬람사회의 타락이 왕실 책임이라고 비난했다.
사우디 왕정은 사상 유례없이 성지 메카에 5만여명의 군대를 투입,2주만에 이들을 유혈진압했다.이슬람 수호자를 자처하면서 메카에서의 유혈진압이라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셈이다.
종교와 현실 사이의 갈등은 사우디 왕정이 소련으로 대표되는 무신론적(無神論的)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자신의 안전을 이교도인 미국에 의존하기로 결심하면서부터 시작됐다.64년부터 75년까지 재위한 제3대 파이잘왕은 풍부한 원 유 수입을 바탕으로 국토개발과 軍의 근대화를 급속하게 추진했다.
67년 8억4천만달러였던 석유수출이 74년에는 2백억달러로 급증했다.
그러나 파이잘왕이 암살(75년3월)되고 파하드 現국왕이 즉위할 때(82년6월)까지 7년동안 중동에서는 격심한 상황변화가 일어났다.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평화조약 체결을 비롯,▲이란 혁명▲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란-이라크 전쟁발발▲ 사다트대통령암살등이 그것이다.
불안을 느낀 사우디는 왕정의 안전을 위해 5대의 조기경보기 도입등 미국제 무기 구입에만 약 2백50억달러를 쏟아부었다.
친미(親美)노선을 분명히 한 사우디 왕정은 매년 사우드家의 왕자와 소수 엘리트층 자제 1만명을 미국으로 유학보냈다.그러나현지에서 음주를 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는등 이탈자가 늘어났으며,이들 사이에 침투된 서구문화의 영향은 큰 부담 으로 작용했다.이들은 귀국후 겉으로는 엄격한 이슬람 규율에 따르는 체했지만은밀한 곳에서는 매일 음주 파티가 열렸으며,각종 대외거래에 개입해 거액의 커미션을 챙기는등 부정부패도 점점 심화돼갔다.
사우디의 딜레마는 걸프전 당시 미군등 다국적군 50만명의 진주를 승인하면서 결정적 국면을 맞았다.이슬람 발상지에 대규모 이교도 군대의 진입은 「두 성지의 충복」이라는 파하드 국왕 자신의 주장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었다.
사우디는 이라크를 굴복시키고 쿠웨이트의 왕정 회복과 자신의 안전을 지키는데는 성공했지만 결과적으로 세가지의 심각한 도전을피할 수 없었다.
우선 국내에서 의사.지식인 계층에서 구미(歐美)型 민주화를 요구하는 기운이 비등했다.여기에다 미국의 은근한 압력이 가세해파하드 국왕은 결국 93년8월 의회 성격의 자문평의회를 발족시키는 선으로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슬람 원칙이 흔들리면서 이슬람 보수파들의 요구 또한 거세졌다.보수파들은 美여군(女軍)이 사우디 해변에서 비키니 차림으로 수영하거나 운전을 하고,심지어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것을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로 간주했다.이에 따라 92년8월 「新와하비」를 자처하는 강경파 학생과교수들이 왕족.관리들의 부정부패와 빈부격차 시정 및 구미와의 관계단절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국왕에게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작 사우디 왕정에 가장 심각한 도전은 경제난에서 비롯되고 있다.걸프전 전비(戰費)만 5백억달러에 이르고 80년대초반이후 계속된 석유가격의 하락으로 사우디는 심각한 재정난에 처해 있다.81년 1천2백80억달러를 기록했던 대외자산은 92년 7백20억달러로 줄어들었다.사우디 정부는 이에따라 지난해 세출을 전년대비 20% 삭감했고,올해도 세출을 전년대비 6.2% 삭감한 예산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사우디의 인구 증가율은 연 3.8%에 이르는 반면 국내총생산(GDP)의 증가율은 95년 1.7%에서 98년엔 2.
7%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IMF 추계).
***회교성직자까지 체포 탄압 또 대졸자 실업률이 50%에 이르고 있으나 왕정은 세출의 3분의1을 차지하는 국방비의 삭감은 체제 유지를 위해 생각지도 않고 있어 국민들의 불만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과거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었던 반정부 세력이급증하는 것도 이 런 이유에서다.
물리학교수 출신인 무하마드 알 마사리가 망명지인 런던에서 조직한 「인권방위위원회」는 각종 부정부패와 국내외 반정부 활동 소식등을 팩시밀리를 통해 국내로 발송,『사우디는 폐쇄사회이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신화를 믿던 체제옹호세력을 경 악시키고 있다. 또 지난해 9월에는 저명한 이슬람 성직자들이 설교 활동에서 손을 떼라는 당국의 지시를 거부한 혐의로 구속됐으며 이에 항의해 가두행진을 벌이던 1천여명이 체포됐다.
여기에다 한때 오일달러 위력 앞에 고분고분했던 인근 아랍국가들의 사우디에 대한 태도도 전같지 않다.특히 이집트를 비롯해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급속히 대두되고 있는 이슬람 근본주의는 이슬람 수장국을 자처하는 사우디의 위치를 흔 들어대고 있다.최근 사우디정부가 외국기자들에 대해 일절 입국비자를 발급하지 않는 것도 이같은 위기감 때문이다.
이슬람 수장국을 자처하면서도 왕정의 안보를 이교도(異敎徒)인미국에 의지하고 있는 모순된 현실 때문에 사우디 왕정의 시름은갈수록 깊어가고 있는 것이다.
〈李哲浩기자〉 崔聖愛전문기자(중앙아시아) 裵明福기자(북아프리카) 李哲浩기자(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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