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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내 생각은…

탄핵 정국 이렇게 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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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 면은 독자들이 만드는 공간입니다. 특정한 사회적 이슈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개진될 경우 이를 균형있게 선정해 소개하겠습니다. 이번엔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문제와 관련된 여러 의견을 모았습니다. 앞으로도 독자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대합니다.

글 보내실 곳 : 100-759 서울 중구 순화동 7번지, 중앙일보 논설위원실 '내 생각은' 담당자 앞

*** "제왕적 대통령 제동 국회가 할 일 한 것"

취임 후 3개월이 채 되기도 전에 대통령직을 "못 해먹겠다"고 투덜대기 시작한 노무현(盧武鉉)대통령은 국민투표로 "국민에게 재신임을 묻겠다", 정계로부터 "은퇴할 용의가 있다"는 말을 예사로 품어대더니 졸지에 탄핵 '피고'가 됐다.

얼마든지 그렇지 않을 수 있었는데 그렇게 된 까닭은 그의 제왕적 오기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4.15총선을 향한 정략적 유인의 소치였던 것 같기도 하다. 어떻든 친인척.측근들의 비리나 북한 정권의 불만에 대해서는 쉽게 사과할 수 있었던 그가 진솔한 사과 한마디를 하지 않아 헌정 사상 초유의 탄핵 정국이 초래됐다.

국회의 탄핵소추로 정치적으로는 사형 구형을 받은 셈인 그가 보인 첫 반응은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부결해 주리라는 기대의 표시였다. 대통령직에 대한 미련을 버린 것 같이 대범해 보이던 그가 법적으로 무죄 선고를 받아 권좌에 복귀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제 그의 시나리오는 탄핵 반대 여론의 조작으로 총선을 유리하게 끝내고 헌재의 탄핵 부결을 유도해 잔여임기를 채우려고 함이 분명하다.

헌재가 열리기도 전에 길거리의 탄핵재판이 시작됐다. TV방송은 초등학생도 탄핵 규탄 인터뷰에 등장시키고 친노민병(親盧民兵)들이 서울.부산.광주 등에서 벌이는 탄핵 규탄 시위를 보도하는 데 극성이다. 헌재가 탄핵을 부결해야 한다는 여론이 75%라고 떠들면서 헌법기관인 국회와 헌재를 매도.압박하는 친위 찬송가를 시대착오적으로 부르고 있다. 근대 민주주의는 왕의 권력을 빼앗아 국회를 대종으로 하는 헌법기관에 갈라주면서 발전한 것도 모르고 말이다.

사실 한국의 어린 민주주의로 말하자면 이번 탄핵소추는 국회가 낳은 기적이다. 종래 정권의 시녀, 또는 사이비 민주주의의 장식용에 불과했던 한국의 국회가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으로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었다. 왕권을 찬탈하기 위한 투쟁에서 승리한 결과로 만들어진 국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4.19 학생의거로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켰지만 그 후 길고 긴 권위주의 시대를 경험했다. 6.29 시민봉기로 대통령 직선제를 성취한 이후의 소위 '민주화'시대는 왕 같은 대통령을 뽑는 절차만을 '민주화'했지 제왕적 대통령을 그대로 두고 '유사'민주주의에 자만해 온 것이 한국의 엄연한 정치현실이다. 헌법상의 권력분립은 '민주공화국'의 명분에 불과하고 국회는 권력의 견제를 통한 권력의 균형을 잡는 것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선진세계의 숙성한 민주주의로 말하자면 盧대통령은 국회가 그에 대한 탄핵을 의결하자마자 사임했어야 마땅하다. 미국에서는 헌재가 따로 없고 의회가 탄핵심판을 관장한다. 거의 모든 선진민주국가는 내각제 나라로서 의회가 정부를 불신임하면 정부가 끝나기 때문에 탄핵재판은 케케묵은(obsolete) 제도로 치부되고 있다.

탄핵심판은 기본적으로 정치재판이다. 헌법은 말이 법이지 기실은 정치적 약속이다. 그런 약속의 준수 여부를 가려내는 것은 정치적 판단에 속한다. 한국은 국회의 탄핵소추에 헌재의 탄핵결정이라는 이중벽을 쳐놓고 제왕적 대통령을 과잉보호해 왔다. 이제 9명의 재판관들로 구성된 헌재는 국회의 압도적 다수(193명)로 가결된 탄핵소추를 심판함에 있어서 한국 민주주의의 장래와 국가의 운명을 감안한 정치적 판단을 내려야 하게 됐다.

이번 탄핵심판의 정치적 결과는 두 가지 중의 하나로 귀착될 것이다. 탄핵 '피고'의 꼬리표가 붙은 盧대통령이 대통령직에 복귀해 정치적 불구의 몸으로나마 촛불데모를 무기 삼아 가두 '민주주의'를 지휘하면서 파행적 포퓰리즘.천도.친북.반미 등으로 나라를 '깽판 쳐' 나가는 것이 그 하나다. 다른 하나는 그러한 노무현 현상에 종지부가 찍혀 한국의 어린 민주주의가 제도로 성장하고 정착해 가는 역사적 기원이 열리는 것이다.

이제 막 시작된 탄핵정국이 오래 가기 전에 盧대통령은 어떻게 해야 애국하며 문명세계의 최고 덕목인 명예와 염치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를 깊이 헤아려 영특한 결단을 내리기 바란다.

이장춘 외교평론가·전 외무부 대사

*** "탄핵 사유 안 되는데 아니면 말고式 강행"

대통령 탄핵소추안에 대해 대다수의 국민은 확신을 가지고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탄핵안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자신들만의 확신을 갖고 있는 것 같다.

탄핵 찬성자들의 논리는 첫째,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은 의회민주주의의 승리로서 이 땅의 민주주의가 한층 성숙해졌다는 증거이며, 둘째, 절차민주주의의 원리에 따라 탄핵에 대한 결정은 헌법재판소에 맡기고, 지금 탄핵 반대니 뭐니 해서 헌재 판결에 부당한 압력이 가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접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국회에서 면책특권을 악용해 '아니면 말고'식의 무책임한 폭로를 일삼던 국회의원들이다.

이번 탄핵의 부당함은 국정공백이나 혼란에만 있지 않다.

그보다는 '아니면 말고'식의 탄핵을 국민을 대변한다는 사람들이 무책임하게도 국민 대다수의 뜻에 반해 '집단적'으로 행동했다는 데 있다. 대부분의 헌법학자나 정치학자들이 탄핵 요건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하고, 국민 60% 이상이 탄핵안에 반대했는데도 말이다.

대통령 탄핵같이 매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는 중대사를, 탄핵사유가 된다고 보는 국민도 '일부' 있으니 한번 헌재의 판단에 맡겨 보자며 대통령의 막중한 권한을 정지시켜 버리자는 것은 무책임한 주장이다. 국민으로부터 책임있는 국정의 한 축을 이루라며 통치권을 위임받은 의원들이 '아니면 말고'를 외치며 집단적으로 국정을 혼란에 빠뜨리는데 어찌 이를 의회민주주의의 승리라고 포장해 줄 수가 있단 말인가.

우리나라 현행 헌법이 갖는 의미를 되새겨 보더라도 이번 탄핵은 매우 부당한 처사다. 현행 헌법은 광주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항쟁의 피와 희생을 바탕으로 국민의 손으로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진정한 민주헌법이다. 이 민주헌법이 탄핵권을 국회에 부여한 이유는 더 이상 또 다른 독재자가 우리 국민을 억압하지 못하도록 국민의 불필요한 희생 없이 국회가 국민의 뜻을 받들어 독재자를 몰아낼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탄핵소추안의 발의는 대통령의 죄가 과중해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는 국민적 공감대를 전제로 해야 한다. 그때만이 국회는 주권자인 국민을 대신해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는 것이다. 국민적 공감대도 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당리당략에 따라 '아니면 말고'식으로 탄핵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국회의 다수가 탄핵을 결정했다 해도 국민이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 그것은 '주인인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통치권을 '하인인 의원'들이 멋대로 남용한 것이 된다.

이러한 권력 남용에 대해 주인은 매서운 회초리를 들어야 한다. 주권재민의 원칙을 바로 세워 한국 민주주의를 더욱 공고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 민주헌법의 정신은 외면한 채 법절차를 따랐기에 문제될 것이 없다는 항변을 받아주고 조용히 헌재의 결정을 지켜보자며 이들을 감싼다면 이는 이 땅에 민주주의의 씨를 뿌리기 위해 치러야 했던 우리 국민의 수많은 희생을 덧없는 것으로 만드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주권재민의 원칙을 바로 세우는 것은 친노와 반노의 문제도, 좌와 우의 문제도, 개혁과 보수의 문제도, 너와 나의 문제도 아니다. 이는 우리 모두가 지켜야 할 공동의 가치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합의 없이 이 공동체가 유지될 수 없듯이 주권재민이라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원칙을 바로 세우지 못한다면 이는 한때 독재를 용인했던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다시 주권재민의 원칙을 세우는 데 한마음 한 뜻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다행히 다수의 국민이 주권재민의 원칙을 이 땅에 확고히 세우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제 국민이 이번 총선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노정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워야 할 차례다.

양재진 연세대 교수.행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