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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길 떠나는 영화 ⑪ - 황윤 <어느 날 그 길에서>

중앙일보

입력

길을 거닐다 생명을 만나다

“고슴도치, 두꺼비, 새, 달팽이, 괄태충, 온갖 종류의 곤충들, 더러는 시골의 아주 작은 오솔길에 이르기까지 그 수는 무수히 많다. 이처럼 온갖 색깔의 반점, 후광, 짓이겨진 자국들로 점철된 아스팔트는 수많은 화석들이 남아 땅바닥의 역사를 읽을 수 있게 된 석반석이나 편암과도 비슷한 형국이다. 이따금씩 나는 배낭을 벗어 내려놓고 길바닥에 무릎을 굽히고 마치 현미경 속을 들려다 보듯, 깔려 죽은 동물의 몸들이 이제는 콜타르와 섞여 어떤 소묘, 선, 원 혹은 장미 창무늬로 변해버린 그 치열했던 전장을 자세히 관찰해보기도 한다.”
자크 라카리에르의 <길을 가며>(1977)에 적힌 한 구절이다. 언젠가 수필처럼 자신의 신변잡기를 찍은 어느 사진가의 사진들을 본 적이 있다. 거기엔 도로에서 죽은 생명들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나 또한 길을 걷다가 개 한 마리가 고속버스에 치어 죽는 걸 목격한 적이 있다. 그 작은 개는 잠시 도로를 횡단하려는 기회를 엿본 것뿐이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바람에 날리는 신문지처럼 그 작은 영혼은 도로를 굴러 다녔다.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끔찍한 순간이었다. 당시에는 그저 불운이라고 애써 위로하고 넘겼다. 그러나 그들의 실수가 아니라 우리의 잘못이라는 것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길을 걷는 사람은 다른 이가 보지 못하는 동물들을 뜻하지 않는 순간에 마주치곤 한다. 어떤 문학가들은 길을 걷다 오솔길 한복판에 잠이 든 독사 떼를 만나거나 수 마리의 들쥐들을 만나기도 했다. 라카리에르도 포장된 도로가의 구덩이에 가득히 버려지거나 아스팔트 위에 납작하게 짓눌려 죽은 짐승들의 공동묘지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던 게 분명하다. 그의 글은 자동차들의 무관심(혹은 무지)으로 인하여, 길에서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희생되었는지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 사고가 아니다. 오늘날 점점 증가하고 있는 로드킬(야생동물 교통사고)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면, 세상이 전혀 다르게 보일 것이다.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발하고 있는 것이 바로 황윤 감독의 <어느 날 그 길에서>다.
황윤의 카메라는 로드킬 조사단의 뒤를 따른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태영과 그의 동료들은 엄청난 속도로 차들이 질주하는 도로 위에서 목숨을 걸고 3년 간 조사를 나선다. 그리고 놀랍게도 지리산 인근 120km도로에서 30개월 동안 발견된 로드킬만 5700건이 넘는다는 결론을 내놓는다. 끔찍하게 죽어가는 동물들. 처참한 학살의 현장이 따로 없다. 영화는 이 죽은 동물들을 연결하면 하나의 도로가 완성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많은 동물이 죽은 건 갑자기 생겨난 도로 때문이다. 인간이 속도를 내기 위해서 만든 인공적인 길은 오랫동안 지켜온 동물들의 서식지나 통로를 단숨에 파괴시켰다.
그러나 동물들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그들의 길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동물들이 도로 위를 지나가는 것은 자신의 삶과 길을 지키기 위함이다. 그렇다. 그것이 그들의 변함없는 본능이다.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발하고 있는 황윤 감독은 ‘워크홀릭’을 지지하는 생태주의자다. 언뜻 생각하면 걷기와 로드킬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의 방식을 회복해야 한다는 답에 이르면, 결국 동일한 문제가 된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로드킬이란 현상은 우리가 지나치게 빨리 살려고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자동차들이 우리 몸의 속도보다 훨씬 높게 설정해서 달려가고 있다. 사실 이 영화는 속도에 관한 이야기다. 사실 걷는다는 것만큼 생태적인 삶의 태도는 없는 거 같다. 나도 많이 걸으려고 하는데, 급하게 살다보니 자동차에 기대게 된다. 도보 여행하시는 분들이 로드킬을 실제로 제일 많이 보고 공감을 한다.”
그 동안 우리는 너무나 편하고 쉽게 살아왔다. 인간의 이동 시간을 줄인다는 이유로 도로는 끊임없이 개발되었다. 자본주의가 낳은 ‘발전’이라는 테제 아래, 생태계를 파괴시키는 일은 모조리 감추어졌다. 이 영화는 편협한 인간의 관점이 아니라 자연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인간이 만든 도로가 자연(지리산)을 속박하고 옭아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사실 동물원에 갇혀서 무기력한 삶을 보내는 야생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

<어느 날 그 길에서>와 같이 상영 중인 황윤 감독의 <작별>은 동물원에 갇힌 야생동물들을 그들의 입장에서 바라본다. 이것은 TV에서 보이는 동물원 다큐멘터리와는 차원이 다르다. 같은 기존의 방송들은 동물원을 꿈의 동산으로 철저하게 왜곡하고 있다. 브라운관 속에서 활기차고 재롱 만점으로 소개되는 야수들조차 사실 동물원에서 고립 되어 외로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황윤은 <작별>을 통해 동물원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드는 시스템과 장치를 전경화시키는 셈이다.
이 영화는 거짓된 진실을 고발하는 데릭 젠슨의 <문명의 엔드 게임>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는 우리의 문화가 착취와 폭력에 기반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문명은 도시 주변으로 계속 확대되고, 지구적 범위에서 인간과 비인간(생물과 무생물을 아우르는)에 대한 착취를 통해서 유지된다. 인간들이 그 착취를 지속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바로 폭력이다. 이 폭력은 체계적으로 단계화된 문명의 구조를 타고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이명박 정부의 한반도 대운하 프로젝트를 재고해야 하는 것도 경제적 이득보다 생명이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운하는 식수와 생태계는 물론이고 우리의 전통을 간직한 문화재까지 심각한 피해(매장)를 입히게 된다.
데릭의 충고대로, 문명이 만들어낸 폭력의 결과 환경은 절멸의 벼랑에 다다랐다. 전통 사회는 절멸되는 과정이고, 그 구성원은 생명을 파괴하고자 하는 ‘죽음의 충동’에 충실하게 된다. 이런 파국을 막기 위해서는, 우리와 동물이 함께 공존하는 생태계가 반드시 보장돼야 한다. 인공적인 수로가 자연의 숨줄을 가르고 동물의 서식지를 모조리 빼앗게 되면 로드킬보다 더욱 끔찍한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우리가 자동차로 달리면 편하지만, 세상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관객들이 <어느 날 그 길에서>를 보고 깜짝 놀라는 것도, 그 동안 수많이 다닌 길임에도 그런 일을 몰랐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우리 팀은 로드킬을 위해 수많은 길을 다니며 찍은 것도 아니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지리산 부근에만 머물러도 그렇게 많은 아픔을 목격했다. 자동차를 타고 갈 때는 검은 점이나 흔적에 불과하다. 반면 자전거를 타는 이들은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많이 본다. 그래서 걷기와 로드킬은 많은 관련이 있다. 걷는 게 원래 삶의 속도라는 걸 깨닫게 된다. 바로 우리의 속도, 그 속도로 가면 우리가 등한시 했던 생명이 보이는 거다. 자동차를 안 타고 걷거나 자전거를 타면 우리는 많은 것을 포기하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사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풍경도 자세히 보고, 작은 나비도 볼 수 있고. 평소에 외면하는 것들과 만날 수 있기에 훨씬 더 좋은 삶의 방식이다.”
보통 건강한 보행자는 시속 4, 5km 사이의 속도로 이동하며, 세상의 크기와 현실에 대해 명료하게 의식한다. 속도가 증가함에 따라 세상의 윤곽선은 흐릿해지고 마침내 시야에서 사라지기에 이른다. 뚜렷한 점은 흐르는 물결처럼 번져간다. 그러나 우리가 걸을 때는 다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구성하는 존재와 형태들의 다양성을 제대로 발견할 수 있다. 만약 신이 우리를 설계했다면 우리의 눈은 분명 걷기에 최적화 된 모델이다. 걷는 사람은 세상과 더불어 사는 시선을 가질 수 있다. “바로 길에서 생명이 보이고 생명을 느끼게 된다”는 황윤 감독의 발언은 이런 사실을 힘 있게 입증한다.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는 것은, 언제나 카메라와 걷고 또 걷는 작업이다. 그렇게 수없이 걸어야 하는 작업이다. 로드킬의 실태를 조사한 태영도 자동차에서 내려 동물의 시신을 확인하는 작업을 만 번이나 했다. 죽음을 조사하고, 사진을 찍고 다시 흙으로 돌려보내주는 작업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두 발로 도로를 걸으며, 그 죽은 영혼들을 위로해 주는 장례식을 치른 것이다. 이 영화는 인간과 동물이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그래, 결국 하나가 아니던가!
더 이상, 우리 자신과 지구를 죽이는 것을 묵인하고 허용해서는 안 된다.

글_전종혁 <프리미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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