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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Review] 학문의 보물창고 활짝 연 공부도둑 ‘마스터 키’는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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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삶이란 끝없이 앎을 추구하며 지내온 과정”이었고 “즐기면서 해온 놀이”였다.

학문의 세계를 ‘보물창고’, 자신을 ‘공부도둑’이라 부르는 이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70·물리학 박사·사진)다. 먼저 그의 얘기를 해보자. 환경운동에 앞장선 실천적 과학사상가로 녹색대학 초대 총장을 역임했다. 특히 자연과학과 철학 사상을 아우르며 독창적인 학문 세계를 구축한 것으로 주목받았다. 2003년 교수신문이 꼽은 현대 한국의 자생이론가 20명 중 자연과학자로서는 유일하게 선정됐다. 책에서 그가 들려준 자신의 얘기를 들어보자.

그는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이해했다. 단순히 이해한 게 아니다. ‘순수한 수학적 세계의 즐거움’을 접했다. 그런데도 학문이 쓸모없는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할아버지 때문에 초등학교 중퇴자로 머물 뻔 했다. 중학교 입학을 목전에 두고 학교 가는 대신 1년은 소를 몰고 또 다른 1년은 고등 공민학교를 다녔다. 다행히 정규 중학교로 편입한 뒤 수석으로 졸업, 공고에 진학했다.

서울대에 지원했을 때는 “반드시 붙게 해달라”는 대신 “공정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자신보다 더 적합한 사람이 있으면 그가 들어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해외 유학을 간 동기도 남다르다. “집안이 정말 어려웠기 때문”이다. 조교 생활을 하며 번 돈으로 집안 살림에 보탰다. 서울대 교수직을 얻을 때에는 경쟁은 커녕 “빨리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실력도 특별했다. 영어와 독일어도 하지만 프랑스어·중국어·일어도 혼자 익혔다. 뒤늦게 한자를 배워 한문으로 된 책도 읽고, 요즘엔 서양지성사를 살피기 위해 라틴어를 공부 중이다.

평범한 독자라면 자신과 별로 닮지도 않은 저자의 ‘공부 이야기’가 내게 무슨 소용일까 물을 수도 있겠다. 혹시 칠십 인생을 ‘1등’ 혹은 ‘승자’(勝者) 로 살아온 이의 현란한 자기 자랑이 아닐까 하고 얄팍한 걱정을 할 만도 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다 기우다. 아니, 공부가 부족한 탓이다. 공부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고, 공부 방식이 틀렸기 때문이다. 득점만 생각하는 공부, 누구를 이기려는 공부에만 매달려온 탓이다. 오히려 이 책을 읽으며 놀라운 것은 이토록 ‘훌륭한’ 저자가 어떻게 뽐내는 기색도 하나 없이 자신의 인생과 학문 이야기를 정겹고 소박하게 들려줄 수 있는가였다. 아버지의 약을 구하러 가다가 어느 고개에서 호랑이를 만났다는 5대조 ‘상할아버지’의 일화부터 아이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까지 구수하게 이어지는 이야기는 흥미진진한 소설책의 재미를 뛰어넘는다. 더구나 집안 내력을 말하기 위해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얘기로 시작한 이야기는 책의 후반부에 이르러 우주의 근원, 생명의 의미를 추구하는 그의 사상까지 엿보게 해준다.

그는 소소한 가족사와 개인사를 자세히 들려주면서 사소한 일화들에서 배운 ‘공부’도 놓치지 않고 이야기 한다. 이를테면 가부장적이었던 증조부와 할아버지를 회고하면서 가부장적 권위의 폐해를 언급한다. 가부장 지배적인 분위기가 건설적인 제안과 창의적인 발상을 짓누른다는 것이다. 많이 배우지 못했으면서도 책을 즐겨읽던 부모님 덕택에 스스로 실천하는 교육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부모가 하는 대로 따라하면 공부가 되었다”는 그는 항상 재미있는 대목에서 오히려 아껴 읽기 위해 책을 덮었던 아버지한테 공부의 즐거움을 익혔다.

그는 이 책에서 줄곧 스스로 터득하는 공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다. 득점 경쟁으로 치달으면서 실상은 배우고자 하는 의욕을 떨어뜨리고 있는 현대 교육의 위기를 지적하기 위해서다. 그가 전하는 ‘생명론’을 접하고 나면 일흔이라는 나이에 접어들어 공들여 이 책을 쓴 이유도 더 잘 이해된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 진정한 주인에게 전해주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면 “40억년이나 이어진 이 온생명(진정한 의미의 생명 구실을 하는 전체)이 결국 내 몸의 주인이자 좀더 큰 의미의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의 이야기는 ‘한 공부꾼의 자기 이야기’면서 그를 넘어서는 이야기가 되었다.

자칭 공부도둑이 쓴 이 책은 도둑이 자신의 보물 창고를 활짝 연 행위나 다름없지 싶다. “내가 평생동안 훔치고 아껴온 보물들, 맘껏 가져가시오”라며 외치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학문은 한 두 사람이 취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존경스럽고 고마운, 진짜 공부도둑이다.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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