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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대한민국탄생>雩南30주기.광복50주년기념 좌담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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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이승만(李承晩)초대대통령 30주기와 광복 50주년을 맞아 이승만을 재평가하는 좌담회를 마련했다.그간 대한민국 「건국」대통령인 이승만에 관해 일반 국민은 물론 학계의 관심과 연구가 너무 소홀했다.역사적으로 그를 평가함에 있어서도 지 나치게 부정적 측면만 강조돼 왔다.한국현대사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 이승만에 대한 보다 객관적이고 균형잡힌 평가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 좌담회에는 유영익(柳永益).김한교(金漢敎).정진석(鄭晋錫)교수가 참석했다.
[편집자註] ▲柳교수=이승만 박사가 돌아가신지 30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광복된지도 50년이나 됐습니다.국제적으로는 냉전체제가 무너져 과거와 같은 우방국과 적대국의 개념이 사라졌고,국내적으로는 문민정부가 들어서 민주주의가 한층 성숙됐습니다.시기적인 면이나 국내외적 환경을 고려해 볼 때 이제는 李박사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만한 시점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듭니다.국내외에서 李박사와 직.간접으로 관련된 자료들도 이제 많이 발굴됐고요.李박사에 대한 국내 연구는 김일 성(金日成)연구 보다 오히려 뒤져 있는 것같습니다.우선 그동안에 왜 李박사에 대한 연구가 등한시됐고 부정적 측면만 부각됐는지 그 이유를말씀해 주시지요.
▲鄭교수=거기에는 세가지 이유가 있는 것같아요.첫째는 현재 우리사회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계층이 연령적으로 볼때 4.19세대예요.이들은 대개 심증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이승만을 독재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죠.둘째는 역대 정권의 역사인식 때문인 것같아요.이제껏 새로 들어선 정권은 그 이전 정권을 부정하는 경향이 매우 강했습니다.셋째는 학자들의 연구자세 때문이죠.대부분의 학자들은 이승만을 객관적이 아니라 편파적으로 연구해 왔어요.얼마 전 한 정치 학자가 정치학자들을 대상으로 역대 대통령의 청렴도에 관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그 결과 李박사가 가장 부패한 대통령이란 결과가 나왔어요.
이를 본 어떤 독자가『이승만시대가 부패했었는지는 몰라도 이승만은 결코 부패하지 않았다』 고 강력히 항의했죠.저도 여기에 동감합니다.李박사가 부패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치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이같은 결론이 난 것은 정치학자들의 인식에 문제가 있다고 봐요.바로 이런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李박사가 독립 운동을 위해 기울인 노력마저 평가절하되는 것같아요. ▲金교수=북한에서는 李박사를 美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로 선전해 왔죠.이같은 선전의 영향 탓인지 몰라도 언제부터인가 우리사회 일각에서는 김일성은 긍정적으로 보는 반면 이승만은 부정적으로 보는 묘한 분위기가 조성된 것같아요.또 경제개발 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1960년대를 기준삼아 그 이후는 좋은 시대고 그 이전은 나쁜 시대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친일파를 많이 고용한 것도 李박사가 비난받는 이유중 하나죠.그런데 저는이렇게 봐요.당시 상황으로는 경제발전을 할 여유가 없었어요.3년동안 6.25를 치렀잖아요.모든 것이 거의 파괴된 상태에서 그나마 원조물자를 토대로 수입대체산업을 일으켰어요.이런 것을 고려하지 않고 이승만시대를 경제적으로 실패한 시대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이죠 .친일파문제만 해도 그래요.나라를다시 세워야겠는데 그 당시 행정경험이나 능력있는 사람이 누가 있었어요.어느 정도 친일했던 사람들밖에 없었잖아요.또 이들중 상당수는 살아남기 위해 친일행위를 한 사람들이었고요.이러니 무조건 비난만 할 수는 없습니다.
▲鄭교수=李박사가 6.25때 학생들의 징집을 면제해 줄 정도로 교육에 열의를 보였기 때문에 60년대 경제성장을 추진할 수있는 인적자원이 마련됐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 점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는 것같아요.이승만은 교육을 매우 중시하는 교육대통령이었죠.
▲金교수=맞습니다.60년대 경제정책 입안자들은 50년대 공부한 사람들이었죠.이때 인재가 양성됐기 때문에 60년대 들어 정치.경제적 발전이 가능했습니다.
▲柳교수=언론인으로서의 이승만은 어땠습니까.
▲鄭교수=1904년 이승만이 미국으로 갈 때까지 그의 활동에대해서는 그동안 잘 알려져있지 않았습니다.그는 젊은 시절 기자로서 맹활약했죠.구국운동 차원에서 언론인으로의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습니다.이승만은 뛰어난 언론인이었습니다.특 히 외교문제를다룰 때 신문을 적극 활용했죠.「말」과「글」이라는 두가지 수단을 최대한 이용해 독립운동을 한 셈이죠.그의 주도로 창간된 최초의 일간신문인『매일신문』에서 그는 외교문제를 상당히 과감하게다루었습니다.감옥생활을 하면서『제 국신문』에 기고한 글들도 매우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었어요.이승만이 한국언론사에 남긴 영향은 절대 과소평가할 수 없어요.
▲柳교수=망명 시절의 이승만에 관한 자료를 보니 미국에서 대학교육을 받고 하와이에 정착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이승만은 본격적으로 정치나 외교활동을 할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더군요.오히려 기독교 교육과 교회활동에 매우 열정적이었어요.
1919년 타천(他薦)에 의해 임시정부 대통령이 되자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그는 독립운동을 하면서「외교독립노선」을 지향했습니다.그의 외교활동은 단순히「호소만 하는 외교」는 아니었어요.그는 美 행정부. 의회.종교단체.언론기관.국민,그리고 국제연맹 등에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주장하고 때로는 설득하는 폭넓은 외교선전활동을 전개했습니다.
▲金교수=이승만은 한국문제 해결은 국제적 합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찍이 간파하고 어떻게 국제여론을 환기시켜 독립을 쟁취할 것인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이같은 그의 노력은 카이로선언문에『한국인의 독립의지에 따라 한국을 적당 한 시기에 독립시킬 것』이라는 문구를 포함시키는 데 영향을 끼쳤죠.물론 이승만 한 사람의 노력으로 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외교노력이 상당한 기여를 한 것만은 틀림없어요.
▲柳교수=해방정국으로 화제를 돌려보죠.이승만은 단독정부를 주장했기 때문에분단의 책임을 결코 면할 수 없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金교수=이승만 한 사람이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다고 해서 우리나라가 분단된 것은 아닙니다.분단된 원인은 1차적으로 국제적인 큰 틀 안에서 찾아야 해요.李박사는 해방직후 처음부터 반공노선을 뚜렷이 했어요.당시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가야 할 길이무엇인지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죠.단독정부 주장도 그 당시 현실여건에서 고심하며 선택한 차선책이었다고 봅니다.
▲柳교수=초대대통령으로서의 업적 가운데 외교면에서의 업적은 두드러지지 않습니까.6.25 직후 韓美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이 그대표적인 예가 아닌지요.
▲鄭교수=건국 초기는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았던 시기였는데 그때 반일(反日)외교노선을 분명히 하고 평화선을 설정한 것 등은신생국가의 지도자로서 매우 배짱있는 외교를 한 셈이죠.6.25기간중 유엔 16개국이 와있었는데도 반공포로를 석방한 것은 대단히 용기있는 행동이었어요.
▲金교수=저는 李박사가 반공.친미(親美)라는 대한민국 외교노선의 기본 골격을 확정한 것을 높이 평가하고 싶어요.이 노선은지금까지도 계속 지켜지고 있지 않습니까.
▲柳교수=李박사는『외교에는 귀신이고 인사(人事)와 내정(內政)에는 등신이었다』는 지적이 있는데 이점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鄭교수=50년대 중반 이후 사회의 부정과 부조리를 효과적으로 척결하지 못한 것은 이승만의 커다란 과오라고 생각합니다.『대구매일』『경향신문』탄압사건 등은 초기 신선한 언론인으로서의 이미지를 상당히 실추시켰죠.아마 나이 탓이었는지 모르겠어요.
▲金교수=저는 李박사가 국가보안법 사건이나 『경향신문』탄압사건,진보당사건 등잘못을 저지른 내정에서의 실정을 굳이 옹호하고싶지 않아요.그러나 방금 鄭교수가 지적했듯이 그 점을 나이와 연관지어 이해하고 싶어요.55년 李박사는 80세 의 고령이었죠.아마 이 무렵부터 그는 정치나 행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완전히 파악하기 힘들었을 거예요.만약 그분이 상황을 정확히 파악했다면 그렇게까지 무리수를 두지 않았을 것같아요.그분의 정의감은대단했거든요.
***「人의 장막」에 가려 ▲柳교수=李박사가 집권 말기에 실정(失政)한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죠.그런데 그 원인은 나이가 지나치게 많았고「인의 장막」에 가려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鄭교수=장기집권에서 오는 체제 자체의 경직도 일을 그르치게한 주요 원인으로 볼 수 있죠.
▲金교수=아마 53년 휴전 직후 은퇴했다면 국부(國父)로서 대단한 존경을 받았을 겁니다.
▲柳교수=그러나 한국 역사에서 李박사가 국가건설에 핵심 역할을 수행한 점은 재평가돼야 하겠지요.
▲鄭교수=요새 수정주의사관으로 과거를 보는데 이승만의 비극이있는것같아요.이승만이 재평가 받지 못한 주된 이유도 거기에 있고요. ▲金교수=이승만의 비극중 하나는 시대적으로 전통문화와 근대문화에 끼어있었기 때문이라고 봐요.전통주의 시각에서는 이승만이 진보주의자지만 근대주의 시각에서는 보수주의자로 보이거든요.이것이 비극이죠.그러나 이승만은 한국의 조지 워싱턴으 로서 전혀 손색이 없어요.한국이 배출한 세계적인 정치가이기도 하죠.
▲柳교수=긴 시간 좋은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리=李東炫현대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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