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良識의 죽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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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양식(良識)의 죽음』은 뉴욕의 변호사 필립 하워드가 최근에낸 화제작의 제목이다.법규 만능(萬能)의 미국사회에 대한 도전장이다.가정에서,고속도로에서,직장에서 부닥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위험을 제거해「위험없는 사회」를 건설하려는 아메리카의 헌신적 노력으로 얘기는 시작된다.
집을 지을 때는 도로부터 먼저 만들어 놓는다.도로의 폭은 소방차 두 대가 왔다갔다할 수 있어야 한다.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벽돌(붉은색)은「위해(危害)」물질로 규정된다.모래속의 발암성 광물질에다 먼지,그리고 조립라인상의 잠재적 위험 때문이다.공중화장실 변기(便器)는 휠체어를 탄 사람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각목의 두께에서부터 널빤지의 이음부분 돌출 면적에 이르기까지 안전 관련 규제 법규는 4천개가 넘는다.
건축자재를 생산하는 자본재 구입에는 2백9단계가 요구된다고 한다.「가능한 최대한도의 안전」이란 입법취지아래 수천개의 법규들이 거미줄처럼 옭아매고 있다.이「질곡」으로부터의 해방을 부르짖는 하워드의 외침은「행복한 고민」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규제법규가 많다고 잘 지켜지는 것은 아니며 법과 규정을 넘어선 양식의 회복말고는 왕도(王道)가 없다」는 그의 메시지가 우리의 관심을 끈다.
미국 하이웨이의 최고시속 55마일(88㎞)을 제대로 지키는 운전자는 10%도 안된다.55마일은 74년 석유위기때 에너지 절약 차원에서 시작됐다.석유위기는 가셨고,자동차의 연료효율과 안전도도 크게 높아졌다.그럼에도 불구하고 21년째 지속되고 있다.벌금 수입에 연연하는 단속 당국,적발될수록 보험료를 비싸게받는 보험회사,레이더속도측정기 제조업계등 소위「삼악(三惡)」의끈질긴 로비 덕분이다.「55마일은 곧 당신의 안전」이라는 구호가 먹혀들 리 없다.
삼풍참사이후「외양간을 고치는」규제법규들이 줄을 이을 모양이다.그러나 법을 넘어선 건전한 양식의 회복만큼 문제해결에 절실한것도 없다.출발점은 건축관련 종사자들의 직업적 양식과 프로정신이다.국내공사에 기능인력기근을 강요하는 건설수출 ,수출품과 내수품에 차등을 두는 수출드라이브,선진 건축기법과 기술도입을 막는 국내시장 보호에서 비뚤어진 균형을 읽는다.건물의 붕괴 기미를 알고 보석등 고가품부터 빼돌린「양식의 죽음」은 두고두고 우리를 슬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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