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국의 문(門)’을 찾아서’ ⑥ 창의문

중앙일보

입력

<창의문> 유일하게 남아 있는 도성의 작은 문

창의문은 중세의 건축물 형태가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보존된 유일한 소문이다. 위치는 종로구 청운동으로 태조 5년(1396) 도성을 쌓을 때 건립되어 영조17년(1741)에 새롭게 개축되었다. 자하문이라고도 하는데 북쪽의 큰 대문인 숙정문이 제 구실을 못한 탓에 북문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 북쪽의 작은 문이 오늘날까지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지형 때문이다.
지금의 북악산은 당시 경복궁의 주산이었는데 이곳 서쪽 마루턱에 북소문이 세워졌다. 다른 문들은 개축 후 추가 보수 기록이 복잡한 것에 비해 이 문은 영조 이후 그 어떤 추가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공식 명칭만 태종 이후로 한 번 바뀌는데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창의문을 장의문(藏義門 壯義門)으로 표현한 사례가 있다. 이것 역시 지역적 특성 때문에 그렇다. 도성에서 창의문까지 올라가는 길에 장의동이라는 마을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장의문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이름이 많아 공부하는 데 애를 먹는 다른 소문들과 마찬가지로 창의문 역시 통용되는 이름이 몇 개씩이나 되니 이를 혼동하지 않으려면 이번 기회에 확실히 정리해두자. 우선 북쪽의 작은 문이라는 뜻에서 ‘북소문’, 그리고 자하동에 위치한다고 해서 ‘자하문’, 창의문으로 향하는 길 기슭에 장의동이라는 마을이 있다 하여 ‘장의문’, 끝으로 본연의 이름인 ‘창의문’이 있다. 그 이름이 유래된 계기를 잘 살펴보면 큰 혼동 없이 쉽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풍수가들은 북쪽의 기운을 좋지 않은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부지기수였던 것 같다. 이런 이론 때문에 기껏 세워놓은 북대문은 줄곧 닫힌 채로 살아갔는데 그렇다 보니 북쪽의 통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서쪽으로 조금 내려와 창의문을 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태종 13년(1413)에 들어서는 창의문마저도 폐쇄된다. 풍수가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청문은 경복궁의 좌우 팔에 해당하는 지맥을 방해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문(門)으로 태어나 그 삶을 제대로 구가해보지도 못하고 긴 침묵을 앓아야 했던 북쪽의 대문과 소문은 세종 때에 들어서야 바깥 공기를 마실 수 있었다. 그것도 처음에는 아주 개방한 것이 아니었다. 역사 정리 작업에 열심인 세종이 그 기록을 위해 편의상 임시로 개방한 것이었다. 그러다 세종 4년 정월에 와서 북대문과 북소문 두 개가 모두 열렸는데, 이 역시 도성 수축 작업의 일환이었다. 어쨌든 잠시나마 활기를 띄게 된 숙청문 사이로 한동안 인부와 군인들이 열심히 드나들었다. 비록 편의상 임시개방 한 것이긴 했으나 기록된 바에 의하면 겨우 그 즈음이 창의문이 제 기능을 발휘한 유일한 시기이다. 세종28년(1446)에 와서는 아예 폐쇄되다 시피 했으니 말이다.
세종은 음양이론과 풍수지리를 신용했다.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서는 항시 날씨와 지형을 과학적으로 살펴야 했는데 그 중간에서 조언을 주는 음양가의 의견이 종종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왕의 신임을 얻은 음양가 이양달은 경복궁을 해하는 창의문을 확실히 폐쇄하기 위해서는 길을 막고 소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쐐기를 박았는데 세종은 이것 또한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창의문은 한동안 사람 구경을 하지 못했다. 문 사이로 이끼가 끼고 넝쿨이 올라올 때까지도 사람들은 잠들어 있는 북소문을 찾지 않았다.
그러다 문종 2년(1452), 풍수가 문맹검이 한 술 더 떠서 창의문이 곧 천주(天柱)의 자리임을 주장했다. 귀하디귀한 천주님을 하찮은 사람이 밟고 다니면 큰 재앙이 일어난다는 거였다. 언제는 천하다고 멀리하더니 이제는 귀한 몸이니 밟아서는 안 된다는 얘기에 창의문의 고독이 더욱 깊어졌다. 통로와 문은 사용할수록 그 활용도가 높을 터인데도 광해군이 집권을 하고도 14년이라는 세월이 더 흐를 때까지 창의문은 눈멀고 귀먹은 채 계속 닫혀 있었다.

창의문은 갑작스럽게 열렸다. 1623년 인조반정군의 피비린내 나는 도끼자루가 문을 열었다. 반정군들은 창의문을 통과해 창덕궁을 장악했다. 그렇게 인조정권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 이후로 계속해서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처량한 세월을 보내던 중 1743년에 기념할만한 일이 일어난다. 정권을 잡은 지 19년을 맞은 영조가 기우제를 지내고 지나가던 길에 손수 현판을 달아준 것이다. 이 현판에는 영조의 품격 높은 시가 새겨졌고 공신들의 이름도 적혔다. 이 현판은 현재 창의문에 걸려있으므로 답사를 가면 직접 볼 수 있다.
이후 영조 16년(1740년)에 들어서 무관 구성임이 창의문을 개수하자고 건의한다. 인조반정 때 의군이 들어왔던 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존재가 흉하다는 것이었다. 이 의견이 받들어져 쓰지도 않을 문을 한 차례 개수한다. 한편 인적 드문 북쪽이었지만 창의문 역시 임진왜란을 피해갈 수는 없어 전쟁 통에 문루가 상했다. 천주의 자리를 상한 채로 둘 수는 없는 일, 그리하여 영조 17년에 중건공사를 하였고 창의문은 도성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그 원형이 보존되어 지금 우리 곁에 남아있다. 그래서 창의문은 다른 문루를 복원하는데 최고의 고증자료로 활용된다.
창의문의 구조를 들여다보자면, 장대형 무사석(武砂石)을 높게 쌓아 일단 육축을 마련했다. 그 육축 중앙에 홍예를 설치해 그 위에 문루를 조성했는데 성문 체성의 규모는 다른 소문과 비슷하다. 기타 구조물 역시 도성의 다른 문들과 비슷한 패턴인데 누조만큼은 유독 이채로운 모습이다. 성문 안쪽으로 빗물의 배수를 위한 누조가 전후 각 2개씩 마련돼 있는데 안쪽의 누조가 화분과 같은 받침형으로 조각돼 있는 것이다.
그 밖의 특징으로는 문 밖의 지세가 마치 지네의 형상과 같아 그 기세를 제압하고자 지네와 상극인 닭의 모형을 나무로 만들어 추녀에 매달아 놓았다는 것이다. 석축의 하단부는 규격이 큰 석재를 사용해 지대석이 석축면에서 돌출되게 축조했고 석축 위로가면서 석재면을 약간 후퇴시켜 쌓는 이른바 되물림 쌓기를 했는데 이는 조선시대 성곽의 기본적 구조다.
다른 문들이 시끌벅적하고도 화려한 삶을 살 때 죄지은 여인처럼 숨죽여 지내야 했던 창의문. 그 고요의 문(門)이 오늘날에 와서는 가장 건재한 모습으로 우리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 역사가 흥미로워지는 또 하나의 대목이다.

tip: 워크홀릭(WALKHOLIC)이 함께 한 김윤만의 서울 성곽답사 ⑥ 창의문~숙정문
창의문 길과 북악산 길이 만나는 지점에 북소문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이 있다. 이곳에서 정해진 시간에 맞춰 북악산 정상-촛대바위-숙정문을 탐방할 수 있는데 이곳은 성곽이 잘 복원되어 있고 성곽을 따라 외길로 답사하기 때문에 부연 설명이나 가이드 없이 도전한다고 해도 별 어려움이 없다.

객원기자 설은영 skrn77@joins.com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