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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도경이 만난 사람 임채정 국회의장] 인터뷰 제1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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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분한 영광 누렸다는 판단에 겸허하게 불출마 결정
■ 대북송금특검은 안 하는 게 나았는데 여론에 밀려 불가피
■ 민주화 성공의 힘 경제로 연결할 신체제 구축 못해
■ 전직 대통령, 자신의 자산 기반으로 활동 계속해야
■ 한국의 진보, 국민의 삶 발전시켜줄 새 틀 짜야 재기한다

요즘 썩 유쾌하지 못할 것 같은 임채정 국회의장. 현재 남아있는 전 정권 출신 인사 중 가장 고위직으로, 오는 5월 임기를 만료하게 된다. 지난 2월 정계은퇴까지 선언한 마당에 거칠 것 없을 것 같은 그의 심경.


월간중앙 정권교체 후 나라가 온통 총선 열기로 달아오르는 현 시점. 임채정(67) 국회의장은 많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다. 지난 3월11일 국회의장실에서 그를 만났다.

1999년 국민회의 정책위 의장 시절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과 변함없이 늘 명쾌한 언변이 마주앉은 사람을 즐겁게 했다. 국회의장으로 취임한 이후 ‘중립성’을 지키기 위해 언론과의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은 그가 사실상 ‘고별 인터뷰’에 응한 것이었다.

인터뷰 제1막
-민주당 공천 박수치고 싶다

▶임채정(林采正)
1941년 전남 나주 출생
광주제일고·고려대 법학과 졸업
1967~75년 동아일보 기자
1979~81년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선출 반대 시위로 투옥
1992년 이후 제14~17대 국회의원
2002년 12월~2003년 2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장
2006년 6월~ 국회의장(17대 후반기)

임채정 의장은 이번 18대 총선에 불출마를 선언하며 후보 신분을 떠났다. 때문에 그는 모처럼 편한 시선으로 이번 총선을 관전하고 있다.

“정치적 목표였던 민주화는 이뤘지만 내용적 민주화, 미래 일류국가의 비전과 길을 마련하는 일에 더욱 천착하지 못한 것이 큰 회환”이라며 대선에서 대패한 통합민주당을 떠나는 정계은퇴의 소회를 밝힌 그는 당의 공천파동이 ‘드디어 살 길을 찾는 모습’으로 보여 힘이 난다고 했다.

-이번에 민주당 공천심사위가 당을 살리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고요.”(웃음)

-불출마를 선언한 입장에서 이번 총선은 홀가분하게 바라볼 수 있겠네요?
“뭐랄까? 이제 작심했구나 하는 느낌, 그리고 정말 정당으로서는 굉장히 어려운 대목인데 그 어려운 대목을 한번 돌파하려는 의지를 갖고 결행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결행이라는 표현이 그냥 단순히 실천이라는 것과 다른 의미가 있잖아요? 민주당으로 봐서는 위기가 기회가 된다고 할까, 그런 가능성도 있을 수 있겠지요. 한국정치라는 좀 더 큰 입장에서 본다면 정말 결단하고 국민에게 다가가 진심을 국민 앞에 내놓으면서 호소하는 그런 의지를 보인 것 같아 일면 신뢰도 가고 또 어려운 결단을 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각 당 지역주의 틀 그대로 유지”

-거물급 탈락자들의 반발에도 지금 제대로 갈 길을 가고 있다는 말씀이네요?
“반발이라는 것은 언제나 있는 것이에요. 이해관계가 있는 곳에서는 어떤 경우 어떤 결정을 내려도 반발은 있어요. 누구나 마음은 있지만 하기 어려운 작업인데, 결행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의장께서도 마음속으로 박수를 치신다는 말씀이네요?
“아는 사람이 많아 박수치고 있다면 안 되는 사람들한테 꽤 비난을 받아야 할 상황이기는 한데, 아무리 그래도 잘한 것을 보고 잘못했다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녜요?”(웃음)

-바른 말 하는 게 장기시잖아요.
“잘하는 일이에요. 한 사람이 서운하고 많은 사람이 만족한다면 당연히 그렇게 가야지요.”

-형사사건에서 금고 이상의 형벌을 받은 사람을 모두 배제하는 원칙이 가혹하다는 원성도 있습니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좀 과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상황적으로 말하면 그렇게라도 해서 결의를 보여야 한다는 취지 아니겠나 싶어요. 국민의 정치불신이 너무 심하고, 정치인의 대오각성을 요구하니, 그 국민의 요구에 부응하겠다는 의지의 몸짓이다, 이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런 규칙이 강화될수록 앞으로 공직에 나갈 사람은 자기관리에 엄격해야 하는 풍토를 만들 수도 있겠네요?
“앞으로 공직에 나아가려는 사람들은 스스로 엄격해질 수밖에 없어요. 여태까지는 우리 사회 분위기가 그랬으니 어느 정도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고, 또 이해할 수 있었고, 일정 정도는 이해도 했고 그랬지만 앞으로는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또 공직 진입이 어려워지는 방향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한나라당은 영남, 민주당은 호남을 사수하고,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는 충청도에 깃발을 꽂으려고 하는 등 이번 총선 역시 지역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죠?
“그 틀이 여전히 상당히 유지될 것 같아요.”

-각 당이 50% 가까운 물갈이로 공천혁명경쟁을 하는 듯하면서도 한편에서는 여전히 이 당 저 당을 기웃거리는 철새 정치인이 공천 관문을 통과해 화제로 떠올랐는데요. 철새 정치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속된 의미의 기회 버려야 얻는다”

“그것은 정치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국회의원이 되고자 하는 것인데, 자리를 탐하는 행위예요. 그러니 그 사람들은 정치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국회의원이 될지는 몰라도 정치인은 아니다, 그리고 정치인이 아닐 뿐만 아니라 정치를 상당히 혼탁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그랬다더군요. 사람을 공천해야지, 새를 공천하느냐고.(웃음) 결국 그 나라의 정치는 그 나라 국민 수준과 똑같이 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대북송금문제로 재판받은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출마도 좌절됐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이하 DJ)과 노무현 전 대통령 사이에 앙금으로 남은 대북송금특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원래는 안 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국가 대 국가 또는 국가와 집단 사이에 어떤 벽을 깨고 일을 시작할 때 협상이라는 것은 거의 경제적 내용을 가지고 협상하는 겁니다. 그것 아니면 무엇을 가지고 협상하겠어요? 그러니 그것은 말하자면 국가관에서 큰 통치의 한 부분이라는 말이지요. 거기에 특별한 잘못이 있다면 모르지만 안 하는 게 원칙이고, 안 했으면 더 좋았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그때 인수위원장을 했지만 그때 여론이 그것을 해 내라고, 그 조사하라는 여론이 엄청나게 높았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새로운 정부가 출발하면서 안 할 수 없었다고 봐요. 그래서 했다고 생각하는데, 안 했으면 더욱 좋았을 것입니다.”

-결국 손학규 대표는 종로, 정동영 전 장관은 동작을에 출사표를 냈는데 출신 지역구를 떠나 서울에서 승부를 걸겠다는 것은 본인들에게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비상시기이거든요. 비상시기이기 때문에 백척간두 진일보지, 그런 심정이 아니고는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어렵다고 본 거지요. 정치인은 던질 때 던질 줄 알아야 하거든요. 자기를 던짐으로써 모든 것을 버릴 수도 있고 얻을 수도 있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버리는 사람들의 용기와 겸허함, 이런 것은 다 정치지도자들의 덕목 아니겠어요? 적어도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배짱이기도 하고….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함으로써 눈앞에 호소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일 수도 있는 것이고, ‘나 여러분이 버리면 버림받겠습니다’라고 하는 결의에 찬 약속이기도 한 것 아니겠어요? 그런 자세는 좋다고 생각해요.”

-노무현 전 대통령이 택했던 방법이네요?
“노 전 대통령이 그러한 과정을 극명하게 보여준 경우지요. 이를테면 누구나 실패하리라고 생각했고 본인도 알았으리라고 보는데, 끝까지 지역감정과 싸우기 위해 안 된다고 하는 부산에서, 서울에서 의원직까지 버리고 부산에서 시장 나오고…. 끝까지 그쪽에서 출마도 하고 하면서 자기가 가질 수 있는 속된 의미에서의 많은 기회를 다 버리고 어려운 길, 좁은 문만 뚫고 들어갔던 것 아니냐고요? 거기에서 국민의 신뢰를 얻었다고 생각해요.”

-반면 한나라당은 이번 총선을 앞두고 대선의 기세를 그대로 끌고 갈 수 있을지 노심초사인데, 내부에서 인수위와 내각 때문에 표 많이 깎였다는 불만이 있더군요.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을 해 보셔서 상황을 잘 아시지요?
“그러게 인수위가 무엇을 결정하고 발표하고 요란스럽고 그럴 것이 아니라고 나는 봅니다. 본래적 의미에서 인수위는 평소 대통령 당선자의 철학과 노선을 인식하고 소화해 이전 정부가 어떤 일을 어떻게 해 왔는가를 받아 정리하는 것이지요. 그 중에서 무엇은 승계하고 무엇은 중지하고, 무엇은 개선하고, 무엇은 보류하고, 무엇은 새로이 시작할 것인지… 이런 것들을 차분하게 정리하면서 새 정부가 출범할 수 있는 기초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인수위의 역할이지요. 인수위 한두 달 되는 상황에서 무엇을 크게 발표하고, 그래서 야단이 나고 국민이 떠들썩하고… 이렇게 하는 것은 인수위의 일도 아닐 뿐 아니라 차기 정부로서도 그렇게 행복한 일이 아니에요.”

-불출마선언을 하신 계기가 있었나요?
“특별한 계기는 없고, 그것이야말로 동양적 미덕 또는 동양적 겸허함 같은 것이에요. 그렇게 말하면 내가 자화자찬하는 것이어서 안 되겠고, 그저 동양적 사고지요. 내가 내 개인으로서는 자리의 관점에서 과분한 영광을 누렸는데 정점에서는 물러서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처음부터 대권 욕심 없었다”

-국회의원 4선 정도 되면 대권 도전의 꿈을 한 번쯤 꿔 볼 만한데, 그런 생각은 없으셨나요?
“그것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데, 저는 처음부터 대권에 대한 욕심은 갖지 않았어요. 내가 정치를 시작한 동기가 남들과 좀 다르잖아요? 내가 1987년 평민연을 결성해 재야활동을 하다 입당할 때 나는 그야말로 민주화를 위해 정치권에 들어간다는 입장이었지, 내가 정치적으로 무엇을 갖겠다는 생각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었어요. 그때 내 생각으로는 한국적 특수성을 감안할 때 재야운동만으로는 민주화가 쉽지 않으니 제도정당과 결합해 힘을 키우고 평화적 선거를 통해 정권교체를 하는 것이 옳다고 봤어요. 그렇지 않으면 민중봉기로 흘러가는 것인데, 그러면 굉장히 어려워진다고 봤지요. 그래서 재야와 제도정치권이 연합 또는 결합해 평화적 선거를 통해 민주화를 이루자는 뜻으로 평민당에 입당했던 만큼 나는 민주화가 목표였지, 대통령이 된다든가 하는 생각은 정말 안 했어요.”

-보통 사람의 심리는 말 타면 경마하고 싶어하잖아요?
“그런다는데 나는 말을 제대로 못 탔나 봐. 그러니까 경마를 제대로 못했지.”(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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