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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걸쳐 촬영한 다큐영화 '송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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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최장기수 김선명(사진 위)씨는 출감 이후 구순 노모와 단 한 차례 만나고 북으로 갔다. 눈물도 웃음도 많은 조창손(사진 가운데)씨는 30년 감옥생활을 겪고 송환됐다. 70년대초 고문에 못이겨 전향했다는 김영식(사진 아래)씨는 퍽퍽한 삶 속에서도 순박한 웃음을 잃지 않는다.

반세기 넘도록 한반도를 질곡에 몰어넣은 분단이 얼마나 훌륭한 얘깃거리가 될 수 있는지, 2004년의 대작영화들은 이 역설의 힘을 단단히 보여준다. 1000만관객을 돌파한'실미도''태극기 휘날리며'만의 얘기가 아니다. 오는 19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영화'송환'역시 제작기간이 무려 12년에 달한다는 점에서'대작'으로 불릴 만하다.

'송환'은 1992년 봄날, 요양소에서 나온 두 명의 비전향장기수를 후배의 부탁으로 자신이 사는 봉천동 산동네에 데려오게 된 김동원 감독(49)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철거민들을 다룬 '상계동 올림픽(91년) 등으로 독립영화계에서 주목받고 있던 그이지만 당시의 촬영은 계획한 일이 아니었다. 감독은 생전 처음 대면하는 '간첩'이라는 존재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카메라를 돌리게 됐다고 내레이션을 통해 고백한다.

*** 선댄스 영화제 수상작

사상의 옳고 그름을 떠나 최장 45년을 감옥에서 보낸 장기수들의 기막힌 사연이 수시로 눈물을 쏟게 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고통의 시간을 돌이키는 그들의 절제된 목소리는 콧등을 쓰다듬는 손짓이나 단발적으로 내쉬는 한숨으로 중단되곤 한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예상치 못한 코미디가 있다. 세상 밖으로 나온 장기수 할아버지들의 표정은 효도관광 나선 촌로 같이 천진하고, 시대흐름을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감독의 재치있는 연출이 번득여 크고 작은 웃음을 자아낸다. 주인공 격인 조창손씨를 비롯,장기수 할아버지들의 개성있는 면면이 마치 연속극처럼 생생하게 포착된다.

웃음과 눈물이 이렇게 공존하듯, 영화 전체는 한 방향으로 가속도를 내는 대신 그때 그때의 명암을 고루 비춘다. 장기수들이 1990년대 후반 집회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이 여러 해 앞서 전향서를 쓰고 출소한 동료는 꼭다문 입매로 이를 지켜본다. 시절이 바뀌어 할아버지들이 북으로 돌아갈 꿈에 부푼 사이 불쑥 찾아온 납북자 가족에게서는 격앙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다큐이면서도'송환'의 분위기는 독특하다. 두 명의 장기수 사이에 어쩌다 끼어앉은 초반 장면처럼 감독은 냉정한 관찰자의 자세를 고집하는 대신 촬영 대상인 장기수들과 자연스레 뒤섞이게 된다. 통념과 달리 감독의 목소리를 내레이션을 통해 직접 들려주는 기법은 지난해 아카데미상을 받은 마이클 무어의 다큐 '볼링 포 컬럼바인'(미국 고교 총기난사 사건을 다룸)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총기난사범들과 일면식도 없던 마이클 무어가 때로는 무례하다 싶을 정도의 각종 실험도 마다않는 것과 달리 김감독은 장기수들과 10여년 세월 동안 쌓은 정을 외면하지 못한다. 대화가 잘 안들리더라도 마이크를 코밑에 들이대지 못하는 순간도 더러 등장하고, 북한의 식량난 같은 문제도 그들에게 캐묻는 대신 일본 저널리스트의 입을 통해 전달된다.

우연에서 시작된 촬영의 쓰임새를 감독이 깨닫게 된 것은 99년께의 일이다. 이들의 송환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 것인데, 남북 화해 분위기가 급물살을 타면서 송환은 예상보다 이른 2000년 가을 성사된다. 감독은 북으로 간 63명 장기수의 소식을 담아 작품을 마무리지으려 하지만 방북계획이 좌절돼 다른 사람에게 카메라를 넘겨준다. 이제는 말쑥한 차림이 된 장기수들의 표정 위에 감독은 실은 자신을 향한 것일지도 모를 현재진행형의 질문을 덧씌워 여운을 남긴다. 관객은 영화 막판의 내레이션을 통해 감독의 카메라가 12년 동안 좇아온 것이 결국 사람의 삶을 지탱하는 힘에 대한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 곳곳 웃음 나는 장면도

'송환'이 개봉에 이른 과정 역시 작은 드라마다. 감독은 지난해 하반기 독립영화제를 계기로 테이프로 500개,무려 800시간에 달하는 방대한 촬영분량을 편집하는 작업을 해냈고, 올 2월 미국 선댄스영화제에서 '표현의 자유상'을 받아 한국 영화로는 첫 수상기록을 세웠다. 비디오.디지털카메라 등으로 찍은 화면을 필름으로 바꾸는 과정은 영화진흥위원회의 독립영화지원금 7000만원으로 충당했고, 극장에 상영할 프린트를 만드는 데는 '태극기 휘날리며'의 강제규 감독이 다섯 벌 값인 1500백만원을 도왔다. 덕분에 늘어난 상영관이 전국 총 7곳. 총 스크린수 1000여개에 비하면 미미한 숫자지만 '송환'이 던지는 울림은 당연히 그 이상이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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