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칼럼>細口巨耳의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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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과거 권위주의정권 시절에는 정부관계자가 귀찮을 정도로 교수들에게 만나자고 하고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이 많았는데 金정부가 들어선 후에는 그런 일이 별로 없다고 하는 얘기를 들은 일이 있다.과거 군출신 정권은 취약한 정통성과 지식인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지식인의 환심을 사고 그들을 정권 주변에 포진시키려는 의도적인 노력을 많이 기울였던게 사실이다.金정부는 정통성을확보한 문민정부로서 그런 콤플렉스가 없어서인지,아니면 별로 물어볼게 없어서 그런지 교수나 지식인 을 만나 물어보고 의견을 구하는 노력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 6.27선거에 참패하고 1천명 이상이 죽고 다친 삼풍붕괴라는 초대형 참사를 맞아 정부.여당에는 자성론(自省論)과 민심수습책이 침통하게 논의되고 있다.평소에는 생각이 있어도 말을 못하던 민자당 인사들이 봇물이 터진듯 민심이반 을 지적하고국정운영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선거결과에 대해 책임질 일이 없다고 하던 대통령도 마침내「민심은 천심(天心)」이라며 선거결과의 겸허한 수용을 표명했다.
정부.여당의 이런 자성론중 유난히 눈길을 끄는 대목이 이른바「직언론」(直言論)이었다.많은 사람들이『이젠 적나라하게 얘기를하자』『총재가 국민의 뜻을 제대로 읽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주장했다.대통령의 감각과 자세에 문제가 있었는 데 직언을 못했다는 뜻으로 들리는 발언들이 많았다.심지어 일부 청와대비서관이암적(癌的)인 존재라는 비난도 나왔는데 이 역시 측근에서 직언을 못하고 직언을 가로막았다는 규탄으로 해석되었다.
직언의 문제는 곧 아랫사람이 윗분에게 바른 말을 할 기회나 분위기가 보장되지 못했고 거꾸로 위에서는 아랫사람에게 물어보지않았다는 얘기가 된다.물어보지 않고 결정하면 독단이 되고 남의말을 안듣고 밀어붙이면 오만이 될 수밖에 없다 .「정부가 국민감정을 무시하고 있다」「너무 오만하게 비쳐졌다」는 민자당의 자가진단은 결국 정부.여당안에 말이 막혀 대통령이 상황을 바로 알지 못한데 까닭이 있다는 얘기다.
다분히 공감이 가는 진단이다.사실 지난 선거에서 민자당에 재앙을 안겨준 몇몇 발언은 직언↓올바른 상황판단의 언로(言路)가있었던들 넉넉히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67세의 정원식(鄭元植)씨를 공천하면서 세대교체를 부르짖는 것은『모순됩니다』라고 말하고 듣는 과정이 있었던들 세대교체론은안나왔을지도 모른다.아아,어찌 우리 잊으랴고 마음속에 깊은 한(恨)을 품고 있는 바로 그 6.25에 하필 쌀 을 보내면서 『외국에서 사서라도 더 주겠다』고 한 것도 『국민감정에 맞느냐』는 사전검토가 있었다면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개혁추진의 방법과 자세도 직언과 토론이 있었다면오늘날 민심이반의 원인의 하나로 꼽히진 않았을 것이다.정치자금을 한푼도 받지 않겠다며 칼국수 식사를 하는 그 시간에도 세금도둑은 날뛰고 서초구청은 삼풍에 대해 「안전이상 무(無)」하고있었으니 개혁의 대상과 방법이 달라져야 했음을 누구나 느낄 수있었다.삼풍참사가 아니더라도 페리號에서,성수대교에서,대구에서…진짜로 시급히 개혁해야 할게 뭔지 판단할 계기가 얼마나 많았는가. 물어보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국민마음을 살피지 않는다는 것이나 다름없다.설사 국민마음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알아보는 노력을 가시화(可視化)하고 그 과정을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그래서 국민들이 정부가 우리 마음을 늘 살피고 있구 나 하고느끼게 해줘야 하는 것이다.그런 노력없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면곧 독단.오만이 된다.
불행히도 지금껏 정부.여당에는 이런 물어보는 정치,언로를 여는 정치가 없었다.직언해 봐야 들어줄까 하는 기분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직언부재(不在)의 풍토로는만사가 결코 잘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높을수록 실정 몰라 중국 明시절 관리였던 여곤(呂坤)은그의 명저(名著)『신음어(呻吟語)』에서 「관직이 높으면 이목(耳目)이 가려진다」고 갈파하면서 군주는 재상보다,재상은 감사(監司)보다,감사는 지방 수령(守令)보다 지식이 못하다고 했다.
관직이 높을 수록 그만큼 실정에서 멀어진다는 뜻이다.일본의 한저명한 경영인이 『경영자는 세구거이(細口巨耳)가 돼야 한다』고했다는데 말은 적게하고 귀는 넓히라는 뜻의 이 말은 정치가들에게도 마찬가지다.細口巨耳 정치라야 하는 것이다.
[논설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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