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高速중독증서 깨어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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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일이지만 『한국인들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는 기사가 외지에 실려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삼풍백화점이 문을 열던 그 날도 어김없이 샴페인은 터졌을 것이다.그 자리에는 백화점 업주는 물론이고 설계업체와 시공업체 관계자들도 있었을 것이다.모르긴 몰라도 허가를 내준 시청이나 구청 관계자들도 샴페인잔을 부딪치며 현기증 나는 고속성장의 화려한 과실을 안주삼아 덕담을 주고 받았을 것이다.
강남의 노른자위 땅에 우뚝 선 삼풍백화점은 고급수입상품을 전략상품으로 과소비 풍조에 물든 일부 강남주부들의 명소로 통했다고 한다.사고가 나던 그날도 독일제 고급자기제품의 대명사인「로젠탈」특별기획판매전이 열리고 있었다.피해를 당한 주부들 가운데는 수입자기를 고르다 변을 당한 사람들도 있었을 법하다.
흉물스럽게 버티고 선 건물 외벽에 아직도 걸려있는 수입자기 기획판매 현수막을 보면서 너무도 일찍 터뜨린 샴페인을 떠올리고,졸속이니 외화내빈(外華內貧)이니 하는 단어와 함께 「모래 위에 지은 성」을 연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우리 가 지은 성은 사상누각(砂上樓閣)에 불과했단 말인가.
속도에는 이야기가 없고 역사가 없다는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의 말에 진정 귀기울일 때가 됐다.지나치게 속도를 내다가는 속도 자체의 노예가 되고 만다.주변을 살펴보고 자신을 돌아볼 여유를 갖지 못한다.
한국사회를 가리켜 다이내믹한 사회라고 말하는 외국인들이 있다.그렇기 때문에 한국에 사는 게 재미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한국인들의 역동성 덕분에 짧은 기간에 고도성장이 가능했다는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그로 인한 부작용을 꼬집는 이중적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집권여당에 철퇴를 가한 지방선거의 충격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백화점이 무너져 내리는 또한번의 충격을 접하면서 한국사회의 역동성을 다시 확인하는 외국인도 있었을것이다.잔인한 일이지만 그래서 역시 한국은 재미있는 사회라며 웃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더이상 우리가 조롱거리가 될 수는 없다.성장을 포기하자는 얘기가 아니다.다만 이제 속도를 돌아볼 때가 됐다는 얘기다.너와나의 마음 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맹목적 습관성 고속주의의 미몽에서 비록 고통스럽지만 깨어날 때가 온 것이 다.
裵明福〈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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