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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29. 아버지에게 들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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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필자의 아버지. 처음에는 딸이 가수가 되는 걸 반대하셨지만, 나중에는 사람들에게 딸 자랑을 하셨다.

피카디리 극장에서 ‘패티 김’이라는 낯선 가수가 ‘리사이틀’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공연을 한다는 포스터가 서울 시내 곳곳에 붙었다. 패티 김이 누군지, 또 리사이틀이 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포스터를 보고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우리 아버지였다. 신문과 잡지에 ‘김인현 씨의 딸 가수 패티 김’이라는 기사까지 났으니 아버지로서는 기가 막힐 일이었을 것이다.

동학농민혁명·갑오개혁이 일어났던 1894년 함경도에서 태어나신 아버지께선 1976년 82세 나이로 돌아가셨다. 고종 28년(1891) 과거에서 3등으로 급제, 진사를 하셨으나 구한말의 어지러운 정세 탓에 평생 초야에 묻혀 사신 할아버지를 무척 존경하셨다고 한다. 전주 김씨 양반가의 후손인 데다가, 일제시대엔 금광을 운영했기 때문에 어려서 우리 집은 상당히 부유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일본 메이지 대학에서 수학한 인텔리겐치아였던 아버지가 해방 후 민주일보라는 신문사를, 또 6·25 전쟁 후에 정경연구회라는 사회학술단체를 운영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2대 회장을 맡았던 정경연구회도 임시정부 문교부장이었던 신석우 선생이 초대회장을 맡았던 유명 학술단체였으나 민주일보는 그 이상의 신문사였다고 한다. 임시정부 부주석 김규식 박사가 초대 사장을 맡았고, 소설가 김동리 선생, 시인 조지훈 선생 등이 기자로 있었다. 편집 진용이 화려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찍이 일본에서 유학하신 아버지는 민주일보와 정경연구회의 운영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상하이와 만주, 마카오 등을 오가며 사업을 하셨기 때문에 상당히 개화된 분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신식 학문을 공부하고 시대를 앞선 사고를 지닌 분이라 해도 한계는 있었다. 어깨를 훤히 드러내고 노래 부르는 딸의 모습이 전봇대마다 붙어 있는 것을 보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사람을 사서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며 ‘패티 김 리사이틀’ 포스터를 떼어오라고 시켰다. 그렇게 모아온 30장도 넘는 포스터를 들고 집에 오셔서는 어머니와 오빠들을 호되게 꾸짖으셨다고 한다.

화가를 꿈꿨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은행원이 된 큰오빠. 오페라 아리아를 유행가처럼 부를 정도로 음악을 좋아했지만 언감생심 꿈도 꿔보지 못한 둘째 오빠. 성악가가 되고 싶었지만 역시 아버지의 반대로 무산되고, 후일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 취직해 영국인과 결혼한 작은 언니. 우리 8남매는 예술적 자질과 끼를 타고났지만 이를 누르고 살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몇 년 뒤에 태어난 나는 어머니와 언니, 오빠들이 감싸준 덕에 그 금기를 깬 첫 케이스가 된 것이다. 1960년 일본에 갈 당시도 큰 오빠가 아버지께 내가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러 가는 것처럼 말씀 드려 위기를 모면했다. 하지만, ‘패티 김 리사이틀’ 포스터 때문에 아버지 몰래 3년째 가수로 살고 있었던 것이 들통나버리고 말았다.

패티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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