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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Review] 여왕 제인의 짧은 통치 긴 여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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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9일 여왕
앨리슨 위어 지음,
권영주 옮김
루비박스,
696쪽, 1만3800원

‘여인 천하’는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음모와 배신의 궁중 암투, 거침없이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들, 그리고 권력의 싸늘한 속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역사 드라마 말이다.

이 책은 16세기 영국 튜더 왕실에서 벌어진 왕위 계승 드라마의 한 자락을 그린 역사 픽션물이다. 도도한 역사의 한 꼬투리에 불과한 사건이지만, 분 냄새와 피 냄새가 야릇하게 섞이는 가운데 얽히고설킨 인간들의 사연이 결코 만만치 않다.

주인공의 이름은 제인 그레이. 입을 때보다 더 기쁘게 여왕의 예복을 벗어던진 여인. 16세에 영국 왕위에 올랐지만 단 9일 만에 죄수로 전락했다.

제인은 그 ‘말썽 많은’ 튜더 왕가의 혈족이다. 그의 외할머니 메리는 영국 국왕 헨리 8세의 여동생이다. 메리는 18세의 나이에 52세 먹은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와 정략결혼을 했다. 하지만 남편이 숨지자 오빠의 반대를 무릅쓰고 첫사랑 찰스 브랜든과 결혼했다. 그 사이에 딸 프랜시스가 태어났고, 프랜시스는 제인을 낳았다.

헨리 8세는 이혼을 위해 로마 교황청과 결별하고 종교개혁을 한 것은 물론, 여섯 차례의 결혼과 두 차례의 왕비 처형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 드라마 같은 삶은 지금도 ‘문화코드’다. 그와 주변의 이야기는 이미 수십 차례 영화로 만들어 졌고, 지금은 ‘튜더스’라는 드라마로 케이블TV에서 방영되고 있다. 현실은 셰익스피어의 드라마보다 더욱 극적이다.

그는 세 명의 적자를 뒀다. 정략 결혼한 스페인 출신 첫 부인이 낳은 메리, 둘째 부인 앤 볼레인에게서 얻은 엘리자베스, 그리고 셋째 부인 제인 시무어 소생인 아들 에드워드다. 이 셋은 모두 영국의 여왕과 국왕에 오른다.

맨 처음 왕위에 오른 이는 에드워드로 10살에 즉위해 15살 때 세상을 떠난다. 에드워드는 선왕의 유언과 고관들의 압력에 따라 왕위를 누나에게 물려주지 않고, 고종사촌 누나인 프랜시스 브랜든의 딸인 제인 그레이에게 넘겨주기로 한다. 하지만 제인의 시대는 고관들의 반발로 9일 천하로 막을 내리고, 왕관은 메리에게 넘어간다.

이 책은 이러한 역사를 옴니버스 적인 방식으로 그렸다. 관련 인물들이 하나씩 차례로 등장하면서 자신의 시각으로 사건을 한 뜸 한 뜸 재구성해나간다.

그러면서 ‘그 세기 가장 섬세한 마음을 지닌 여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제인의 면모가 드러난다. 그런 섬세하고 고귀한 심성도 인간의 욕망과 권력 앞에선 아무런 미덕도 발휘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어려서부터 많은 교육을 받아 교양을 쌓은 그는 원래 왕비 감으로 점찍혔지만, 거대한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 원치 않은 결혼을 하게 된다. 여왕에 오른 것도 그의 의사가 아니었다. 그러다 끝내 아버지, 시아버지, 남편, 그리고 친척인 메리 여왕을 비롯한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배신과 이용을 당한 끝에 목이 잘리게 된다. 원제 ‘Innocent Taitor’.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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